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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부총리 마음녹인 '방탄조끼' 사연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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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샤리스타니(左), 유정준(右)

지난 17~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선 전후 이라크 국가재건과 성장방안, 정유시설 현대화를 주제로 한 ‘이라크 리파이너리 2012’ 콘퍼런스가 열렸다. 이라크 정부 인사뿐 아니라 셸, 토탈, 루크오일 등 이라크 재건사업 참여에 관심을 가진 전 세계 200여 개 기업이 참석했다.

 주인공은 단연 이라크의 알 샤리스타니(71) 부총리였다. 사담 후세인 치하이던 1979년 핵개발 참여 지시를 거부해 11년3개월간 옥살이를 했던 핵과학자로 2004년 과도정부 수립 땐 총리 물망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본인이 고사한 뒤 석유장관과 부총리를 맡으며 이라크 실력자로 자리 잡았다. 콘퍼런스 참여 기업 모두가 면담을 원했지만 그는 17일 SK를 포함한 4개의 회사만을 택했다. 유정준(50) SK㈜ G&G 추진단 사장이 그를 만났다.

 이틀 뒤인 19일 이라크 정부는 SK이노베이션과 한국가스공사를 포함한 47개 외국기업에 다음 달 말 진행될 석유·천연가스 개발사업 입찰 자격을 줬다. 세계 1위 엑손모빌은 제외됐다. 지난해 10월 쿠르드족 자치 당국과 맺은 유전 탐사계약 때문이다. 이라크는 쿠르드족과 거래하는 기업엔 입찰 참가권 박탈 등의 페널티를 준다. SK도 2007년 쿠르드 자치당국과 광구개발 계약을 체결한 것 때문에 수년간 불이익을 겪다 이번에 ‘복권’됐다.

 이틀 간격으로 별개의 나라에서 생긴 이 일들은 우연의 일치일까. 업계에선 이라크 관계정상화 프로젝트를 총괄해온 최재원(49) 수석부회장과 유정준 사장이 샤리스타니 부총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2009년의 ‘방탄조끼 사건’이 이번 결실의 큰 원인이 됐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국제유가가 급등하던 2008년 SK는 이라크 원유 공급 중단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라크가 쿠르드족과 관계하는 외국기업과는 거래하지 않겠다며 매일 5만 배럴(하루 도입량의 5%)씩 주던 원유를 끊은 것이다. 그해 초 다보스포럼에서 SK 관계자들과 샤리스타니 부총리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를 계기로 양측은 이라크 재건문제와 에너지 협력방안을 지속적으로 논의했다. 그 결과 2009년 원유금수 조치가 해제됐다. 물량은 오히려 이전보다 30% 늘어 하루 6만5000배럴이 됐다.

 SK 측은 2009년 5월 원유 재수출에 대한 감사의 표시와 이라크 측이 요구한 정유공장 현대화 프로젝트 참여를 위해 이라크를 방문키로 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테러로 인해 이라크에서 하루 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비슷한 시기 이라크를 찾은 미국·일본 에너지 기업인들은 바그다드 공항에서만 머물다 돌아갔다. 하지만 최재원(49) 부회장과 유정준 사장은 가족에겐 “두바이에 출장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방탄조끼를 준비했다. 그들은 방탄복을 입은 채 바그다드를 방문, 현지 군인들의 협조를 받아 정유공장을 둘러보고 샤리스타니 부총리를 만났다. 샤리스타니 부총리는 감명 받아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SK의 이라크 정유공장 현대화 프로젝트 의향서가 체결됐고, 17일 런던 콘퍼런스에선 이 프로젝트가 소개됐다.

 이날 만난 유 사장과 샤리스타니 부총리는 방탄조끼 사건을 함께 회고했다고 한다. 샤리스타니 부총리는 “아스팔트, 석유저장기지, 발전사업 등 SK의 석유 관련 기술력과 수행능력이 이라크 재건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조속히 가시적 진전이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9일 이라크 정부가 SK의 입찰 참여권을 되찾아줌에 따라 샤리스타니의 말은 ‘우정’을 담은 메시지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SK 관계자는 “ 방탄복 외교를 펼쳤던 때는 보험사들이 출장자 보험도 들어주지 않을 만큼 위험한 때였다. 그만큼 파트너에 대한 신뢰도도 높아진 것”이라며 “다음 달 열릴 입찰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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