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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한국 특유 문화 아니다 … 대중문화의 국제화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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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기 소르망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 교수가 20일 조선호텔에서 남정호 순회특파원을 만나 한류와 한국의 문화정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프랑스의 저명한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 파리 정치대학 교수. 지한파(知韓派)로 통하는 그가 한류와 한국의 문화정책에 대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쏟아냈다. 소르망은 “한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들이 손잡고 한국의 문화 홍보정책을 적극적으로 펴야 하는데 이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또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이 소홀하다는 지적도 했다. 그는 “한국적 독특함이 살아있는 한류가 되려면 예술가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면서 “그런데도 이들을 위한 한국 정부와 공공 분야의 지원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고 질타했다. 세계경제연구원(이사장 사공일)이 주최한 ‘문화와 한국경제, 그리고 한류’ 세미나 참석차 방한한 그를 20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한류를 어떻게 보나.

 “한류는 한국 특유의 문화로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글로벌한 문화현상으로 인식하는 게 옳다. 왜냐하면 외국 젊은이들이 K팝을 좋아하는 건 독특한 한국 문화가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비슷비슷한 대중음악 중에 한국 아이돌그룹의 노래가 마음에 드는 것뿐이라는 얘기다. 대중문화의 국제화는 이제 보편적 현상이 돼 한국의 아이돌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의 팝그룹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한류가 한국적인 독특함이 아닌 전 세계에서 통하는 보편성 덕분에 많은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탓에 한류의 생명이 의외로 짧을 수 있다. 한류만의 특별한 개성이 없어 어느 날 갑자기 중국·호주의 물결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한류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

 “한류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면 한국 특유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추상적인 얘기지만 한국의 예술가들이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한류가 계속 갈지 아닐지가 결정될 것이다.”

 -한국의 국가 이미지는 어떤가.

 “한국이 너무 많은 이미지를 내세워 혼란을 부르는 것 같다. 프랑스의 경우 ‘에펠탑(La tour Eiffel)’을 유일한 국가적 로고로 쓴다. 하나 한국 공항에 내리면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표어도 있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글귀도 눈에 띈다. 여기에 ‘하이 서울’도 있다. 이렇게 되면 혼란이 생기고 뭐가 뭔지 모른다. 서로 모순되는 선택들은 아예 없는 것보다도 못한 법이다.”

 -왜 이렇게 됐다고 보나.

 “한국이 여러 가지 이미지를 표방하는 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라는 특성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한국의 문화는 여전히 오랜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국제적 감각에 눈을 뜬 새롭고 현대적인 한국도 존재한다. 이런 정체성의 혼돈이 서로 상충되는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표방하는 모순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케팅에 성공하려면 하나만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게 필요하다.”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건 ‘인도의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타고르의 시에서 나온 거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이런 인식을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대신 나온 게 ‘다이내믹 코리아’였다. 그러나 나는 김 대통령에게 이게 적절치 않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요즘엔 누구나 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어서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건 큰 호소력이 없다. 개인적으로 안전한 한국, 즉 ‘세이프 코리아’가 좋지 않나 싶다. 북한이 옆에 있긴 하지만 (웃음) 한국이 민주화되고, 보다 안정적이 됐다는 긍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다. 하나 한국 정부가 국가의 상징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하려 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전문적인 마케팅 또는 홍보회사가 과학적인 기법을 동원, 삼성·현대를 위해 하듯이 한국에 가장 어울리는 로고와 표어 등을 골라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여러 차례 조언을 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 브랜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케이스를 소개해 달라.

 “국가 이미지를 가장 잘 가꿔온 나라는 일본이다. 2차대전 직후 일본의 이미지는 형편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기점으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 정부는 마케팅회사를 고용해 이미지 제고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지금의 일본은 예술 분야에서 앞선 국가라는 인식이 퍼져 있는데 이것은 마케팅의 승리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각국에서 자기 나라의 문화와 생활 양식을 소개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도 같은 전략을 취해 각국에 ‘공자학원’을 짓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홍보하려는 문화의 성격이 서로 달라 아직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조직이 크지 않을뿐더러 학술과 연구 분야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삼성·현대 같은 국내 대기업들이 외국에서 자신들의 국적을 밝히길 꺼려 한국의 이미지 제고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세계 시장에서 그간 한국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 기업으로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한국의 이미지가 급격히 좋아짐으로써 한국산(Made in Korea)이라는 걸 밝히는 게 도움이 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20년 전엔 한국제 휴대전화라면 아무도 사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바뀌지 않았나. 자동차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제 한국산 자동차는 미국·일본차들하고만 경쟁하는 게 아니다. 중국차들과도 싸워야 한다. 이럴 경우 한국산이라고 선전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국가 이미지를 높이려면 예술가들에 대한 정부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했는데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한국 정부의 소홀한 예술인 지원에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지난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이우환의 개인전이 열렸었다. 한국 정부와 기업 모두에게 자신들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너무나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한국 영화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에서도 한국 영화는 인기다. 그런데도 이를 이용한 홍보는 없는 것 같다.”

 -프랑스 관객들은 한국 영화를 어떻게 보나.

 “한국 영화에서 폭력성이 짙은 사실에 놀란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이런 폭력성이 낯설다. 그러나 폭력을 위한 폭력이 아닌, 합리적 이유가 있는 폭력이라는 점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한국의 문화 정책에 대해 조언을 해달라.

 “개인적으로 따끔한 충고를 하나 하겠다. 서울에는 아시아 최고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아 학생들이나 갈 뿐이다. 왜 해외 박물관들과 교류하지 않고, 소장품들도 외국에서 전시하지 않는가. 세금만 낭비하면서 한국의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거다.”

 -한국의 예술을 관통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단순함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백자 달항아리와 이우환의 작품 모두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재료의 단순함, 표현의 단순함 모두 지극히 인상적이다. 더 이상 단순할 수 없을 정도다. 과거 가난한 나라였기에 그리 됐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예술은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