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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금<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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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덕일
역사평론가

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웠던 인물 중 한 명이 진 무제(晉武帝) 때 인물 석숭(石崇)이다. 금곡(金谷)이란 말은 석숭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석숭이 낙양(洛陽) 서북쪽 계곡에 금곡원(金谷園)이라는 별장을 지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녹주전(綠珠傳)』에 따르면 계곡에 금수(金水)가 흐르기 때문에 금곡이라고 전한다.

 석숭은 1000여 명의 미인 중에서 수십 명을 선발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아꼈던 애첩이 녹주였다. 녹주는 피리를 잘 불고 ‘명군(明君)’이라는 춤도 잘 추었다. 명군은 흉노(匈奴) 황제에게 시집가야 했던 비운의 미녀 왕소군(王昭君)을 뜻한다. 소(昭)자가 진나라 문제(文帝)의 이름이기 때문에 소(昭)자를 비슷한 명(明)자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석숭의 호사생활은 다름 아닌 녹주 때문에 파탄에 처한다. 녹주를 달라는 권신 손수(孫秀)의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모함에 걸려 처자 열다섯 명과 함께 처형당했다. 수레에 실려 처형장인 동시(東市)로 끌려가던 석숭이 “종놈들이 내 재산을 탐냈기 때문이다”라고 억울해하자, 압송하는 사람이 “재산이 해를 끼치는 줄 알았으면 어찌 일찍이 분산시키지 않았는가”라고 충고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시의 귀신(詩鬼)이라고 불렸던 당(唐)나라 이하(李賀)는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을 풍자한 ‘소년을 조롱함(嘲少年)’이란 시를 지었다. 이 시에서 그는 “태어나 반 권 책도 읽지 않았지만, 다만 황금을 쥐고 귀한 신분 사들이네(生來不讀半行書/只把黃金買身貴)”라고 비판했다. 세습 부자에 대한 이런 반감 때문에 자식에게 황금보다는 지식을 물려주라는 교훈이 생겨났다. 『한서(漢書)』 ‘위현(韋賢)열전’은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 추(鄒)읍 사람 위현이 네 아들을 모두 공부시켜 동해 태수(太守)나 승상(丞相) 같은 고위 관직을 역임하게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추읍의 선비들이 “황금이 가득한 상자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경서 한 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고 칭송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광산 채굴을 엄금했던 것은 배금(拜金) 풍조가 성행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영조 5년(1729) 호조에서 함경도 안변(安邊) 금곡(金谷)에서 은(銀)이 많이 생산되니 광산을 열어 채취하게 하자고 청하자 영조는 당(唐) 나라 권만기(權萬紀)가 은(銀)을 채취하자고 청했을 때 당 태종이 ‘수백만 꿰미의 은을 얻는 것보다 어진 인재 한 사람을 얻는 것이 낫다’고 거절한 사례를 상기시키면서 허용하지 않았다. 여러 재벌가에 돈을 둘러싼 형제간의 다툼이 반복되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의가 없는 부는 칼날 끝에 놓인 것이라는 사실을 석숭의 사례는 보여준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