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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국립외교원, 이런 외교관 양성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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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1986년 2월 필리핀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레이건 대통령은 필립 하비브를 특사로 현지에 파견했다. 귀국 후 그가 대통령에게 건넨 첫마디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도둑놈이고 그 부인은 더 큰 도둑입니다. 이들 부부가 온 나라를 약탈하고 있습니다”였다. 레이건과 마르코스가 절친한 친구 사이임은 잘 알려져 있었고 누구도 하비브가 감히 그런 보고를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레이건의 반응은 간명했다. “정말 그런가?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사실이겠지.” 이후 마르코스는 실각했으며 필리핀 민주화의 길이 시작됐다.

 1970년대 초에 주한 미 대사를 지내면서 유신체제와 각을 세우기도 했던 하비브는 이처럼 용기 있는 태도로 오늘날까지도 워싱턴 외교가에서 가장 모범적인 직업외교관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비브가 세운 ‘직업외교관의 소신’이라는 전통은 베트남전의 진실을 담은 ‘펜타곤 보고서’의 필자 중 한 명이었던 리처드 홀브룩이나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정면에서 비판했던 존 네그로폰테 같은 ‘후계자’들로 이어졌다.

 우리도 이처럼 소신 있는 외교관들을 길러낼 수 있게 될까. 2007년 1월 이명박 정부 출범에 즈음해 중앙일보는 외교선진화를 위해 ‘서희 외교 아카데미’를 설립하자는 캠페인을 전개한 바 있다. 입법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거치긴 했지만, 이러한 목표를 표방하는 국립외교원이 4월 24일 공식 출범한다. 21세기형 외교인재를 양성하고 현안에 대한 중장기 정책과 비전을 세우는 동시에 총체적 외교역량 강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는 국립외교원에 거는 기대가 크다.

 반면 우려되는 부분 또한 적지 않다. 후보자 60명을 선발해 이 가운데 20명을 탈락시키고 40명만을 외교관에 임용한다는 구상은 ‘규모의 경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단지 40명 외교관을 키우기 위해 그렇듯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뿐더러 기존의 외무고시와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일각의 반대가 있더라도 더 많은 학생을 선발해 외교통상부는 물론 심각한 국제전문 인력난을 겪고 있는 다른 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도 공급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외교관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우선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외교관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우리 외교관들에게 쏟아진 비판 가운데 하나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며, 외교의 본질보다는 절차와 의전에 치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한국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 지금은 대전략을 꿈꾸는 이들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1870년 이후 독일을 유럽 외교의 중심에 서게 한 ‘비스마르크 구상’은 당시 독일의 젊은 외교관들이 일궈낸 작품이었다. ‘크로 메모’로 20세기 초 영국 외교전략의 기틀을 마련한 에어 크로도 40대 초반의 직업외교관이었고, ‘소련 봉쇄(containment)’라는 미국의 냉전전략을 처음으로 제안한 조지 케넌 역시 국무부의 야심 찬 젊은 외교관이었다. 이렇듯 원대한 꿈을 갖고 자국 외교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인물들을 키워내야 한다.

 실력 없는 야심은 객기일 뿐이다. 외무고시를 폐지한 이유는 고시를 패스하는 능력과 외교 실무를 수행하는 능력 사이의 편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국립외교원 출신 외교관은 최소한 하나의 지역(아시아·중동·미주 등)과 하나의 기능 영역(안보·통상·국제법 등)에 대해서는 전문가에 준하는 능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또한 영어를 포함해 최소한 두 개의 외국어에 능통한 어학 실력도 필수적이다. 특히 소통력과 협상력이야말로 실무형 외교관의 핵심조건이다. 국립외교원이 이러한 요소들을 교육 프로그램에 충분히 반영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고, 특히 현장실습을 강조하는 대목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줄서기에 바쁜 영혼 없는 외교관’, ‘진급과 보직에 목이 매여 상부의 잘못된 지시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침묵하는 외교관’을 배출해서는 안 된다. 투철한 국가관은 물론이고 진실에 강하고, 줏대가 있으며, 국익을 위해서라면 입신양명에 연연하지 않는 용기 있는 외교관을 길러내야 한다. ‘하비브의 전통’을 능가하는 소신의 자세를 젊은 외교관들에게 심어주는 일이야말로 국립외교원이 맡아야 할 가장 큰 책무다.

 새로 출범하는 국립외교원이 또 하나의 진부한 관료집단으로 전락한다면 한국의 외교안보 또한 추락하고 만다. 아무쪼록 상상력과 역사적 성찰, 투철한 국가관에 실력, 용기와 소신까지 겸비한 외교관들을 성공적으로 길러낼 수 있기를 바란다. ‘외교입국’의 미래가 국립외교원에 달려 있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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