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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66) “사령부를 포격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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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9월, 북한을 방문한 중국공산당 부주석 겸 국가주석 류샤오치를 평양역에서 영접하는 김일성과 최용건(김일성 뒤). [사진 김명호]

중공은 창당 이래, 위기에 직면했을 때마다 최고 거물 한두 명을 희생양으로 만들곤 했다. 1966년 8월 1일, 중공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다. 시작 3개월 남짓한 문혁의 방향과 실행방법을 결정하는 회의였다.

마오쩌둥이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덩샤오핑 등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입장하자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 주석은 류샤오치, 비서장은 저우언라이였다. 저우언라이가 건네준 종이쪽지를 받아 든 류샤오치는 중앙문혁소조원과 각 대학의 조반파 영수들이 회의장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류샤오치가 개막을 선포하자 모두 기립했다. 평소 하던 대로 국제가를 부를 차례였다. 류샤오치는 귀를 의심했다. 민가(民歌) 같지만 분명히 민가는 아니고, 행진곡 비슷하면서도 행진곡은 아닌 이상한 노래였다. “대항해를 하려면 조타수에게 의지해야 한다. 만물이 태양에 의지해 성장하듯이, 혁명을 하려면 의지할 것은 마오쩌둥 사상밖에 없다.” 이런 내용이었다. 가사를 잘 모르다 보니 입술을 우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힐끗 보니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저우언라이는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회의 규정을 설명했다. “회의기간 동안 외출과 전화, 서신 발송을 불허한다. 참석자들은 숙소 밖에서 숙박할 수 없다. 사사로운 조직활동을 하지 마라. 문건과 자료는 회의가 끝나면 모두 회수한다.”

류샤오치는 30분간 발언했다. 사령부라는 용어를 썼다. “지난 4년간, 정치국과 상무위원들은 마오 주석의 지휘를 받았다. 당 중앙에는 한 개의 사령부, 마오 주석이 영도하는 무산계급 사령부가 있을 뿐이다. 나와 다른 동지들은 참모나 조수에 불과하다.” 이어서 각급 학교에 공작조 파견한 일을 거론했다. “깊이 반성하고 책임을 지겠다. 이번 회의에서 검토 받기를 원한다.”

덩샤오핑도 류샤오치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 “모든 잘못은 서기처가 저질렀다. 총서기인 내게 책임이 있다.”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을 슬쩍 쳐다봤다. 바로 옆에 꼿꼿이 앉아 눈길 한 번 안 주더니 휴식시간이 되자 회의장을 떠나 버렸다. 뒷모습이 다시는 돌아올 사람 같지 않았다.
그날 밤 마오쩌둥은 문혁소조원 7명을 호출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학생운동을 진압했다. 이건 국민당이 하던 백색공포다. 그러고도 중앙에 사령부가 하나밖에 없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지금 베이징에는 두 개의 사령부가 있다.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나와 린뱌오, 그리고 너희들이 한 개의 사령부다. 다른 사령부는 자산계급을 대표하며 백색공포를 자행했다. 홍색공포가 백색공포를 제압해야 한다. 내게 방법이 있다”며 회의기간을 연장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아직 발언을 안 했다. 회의장에 가서 내 뜻을 전해라.” 이어서 칭화대학 부속중학 홍위병들에게 전달하라며 친필 편지를 건넸다. 원래 회의는 6일까지였다.

8월 5일 점심 무렵, 중난하이에 있는 제1식당 담벼락에 큼지막한 대자보가 1장 나붙었다. 필체만으로도 작성자가 누구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대자보였다. 맨 끝에 마오쩌둥(毛澤東), 이름 석 자가 선명했다.

“사령부를 포격해라(砲打司令部).” 제목부터가 엄청났다. “동지들은 읽어주기 바란다. 지난 50여 일간 중앙과 지방의 지도급 동지들은 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자산계급 편에 서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타격을 가했다. 시비가 전도되고 흑백을 뒤섞어 놓았다. 다른 의견을 탄압하며 자산계급의 위풍을 만천하에 떨쳤다. 독초는 제거해야 한다.” 류샤오치의 이름은 여전히 거론하지 않았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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