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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한갑수 농림부 장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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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갑수(韓甲洙)농림부장관은 지난 8월 초 취임사에서 농가부채 문제를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로 꼽았다.

주변에서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다. 불과 몇시간 전에 장관 임명 통보를 받은 터라 '앞으로 잘해보자' 는 식의 인사말 정도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는 지금처럼 농가부채 문제가 본격적으로 붉어지기 전이었다. 그래서 농가부채 문제는 그 자신이 농림부 출신(1973년 유통경제국장 역임)임을 알리기 위한 수사(修辭)나 의지표명 정도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넉달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은 적중했다. 농민들이 두차례 대규모 시위에 나섰고, 정부와 여야는 농가부채 관련 특별법안을 다듬고 있다.

韓장관은 취임 인터뷰 때만해도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낸 경력에 걸맞게 ‘책임경영’과 ‘시장경제’라는 단어를 섞어 썼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에서는 ‘농업은 민족산업’이라는 말을 여러번 쓰며 농민의 편에 다가서는 모습을 보였다.“농가부채 경감은 농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말도 했다.

-우선 며칠전 경북 의성에서 농민들에게 감금됐다고 들었는데,심정이 어땠나.
“(웃으면서)감금은 무슨‥.그냥 잠시 둘러싸여 있었는데.농민 몇분과 대화하러 갔었는데 장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그곳 농민들이 군청을 에워쌌다.

그러나 농림부 장관이 농민을 무서워 해서야 돼겠느냐는 생각에 농민들 요구대로 연단에 섰다.장관으로서의 어려움을 솔직히 말했고,자리를 걸고 부채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더니 다행히 돌멩이는 날라오지 않더라.”

-이번에 국회에서 농가부채 경감을 위해 국회에서 특별법을 추진하는 것을 두고,법제정은 나쁜 선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는데.
“89년에도 이자를 일부 면제하는 특별법을 만든 적이 있다.하지만 이런 특별법은 일관된 정책집행에 걸림돌이 될 수 있어 법 대신에 재정지원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런데 농민들이 한사코 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농림부가 약속해도 기획예산처 등에서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거다.정부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걸 확인했다.”

-국회 논의는 어떻게 돼가고 있나.
“현재 예결위와 상임위에서 협의 중이다.다른 예산을 깎아서 새로 예산을 책정하는 일이라 어렵긴 하지만 당초 정부안보다 훨씬 큰 폭의 지원이 특별법에 담길 것으로 본다.어차피 농민단체의 요구안에는 부응을 못하지만 농민들이 만족할 수준은 될 것이다.”

-거꾸로 도시 서민들이 불만을 표시한다고 들었다.부채경감의 재원이 국민 세금이기 때문이다.국회가 농민시위 한번에 앞다퉈 특별법을 만든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농업인구는 9% 밖에 안되지만 따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그동안 경제개발 과정에서 농민들은 다른 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

그런데 대한 보상으로 볼 수도 있다.물론 사회적 합의는 중요하다.그래서 정부가 재정의 여력과 농민의 부채상황,비농업과의 균형을 종합해 이번에 부채문제 해결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화 과정에는 싼 임금을 받고 일했던 도시근로자들의 희생도 있었다.그런데도 농민들의 부채만 특별히 깎아준다면 형평에 어긋나지 않나.”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빈부의 문제와 농업지원정책은 분리해 봐야 한다.단순비교를 하자면 농민들은 당장 1백10조의 공적자금을 들먹인다.

물론 공적자금의 성격이 다르지만,농민단체들은 “결국은 그 혜택이 금융권 종사자나 기업 근로자에게 가지 않느냐”고 지적한다.

연체이자를 완전히 탕감해 주는 것은 금융질서를 저해하는 것이라 반대한다.다만 다만 농민들이 숨을 좀 돌리도록 연체이자율을 일반이자율로 낮춰줘 그 차액만큼 감면해 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농가부채 문제는 되풀이되고 있다.앞으로도 부채가 또 쌓이면 농민들은 시위하고 그러면 정부는 다시 부채를 감면해 주는 악순환이 우려되는데.
“농민들이 그 정도까지 자존심이 없지는 않다고 본다.잘 하려고 하다가 도저히 안되는 상황이 됐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최근 농가부채의 발단은 92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직후 정부가 농산물 시장개방에 대비해 대규모의 농촌구조개선 사업을 벌인 데로 거슬러 올라간다.이른바 ‘42조원 투·융자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98년부터 상환이 도래하면서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때마침 외환위기가 닥쳤던 것이다.당시 재정이 좋았으면 장기 분할상환으로 돌렸을 텐데 그럴 형편이 못돼 2∼3년 단순히 연기하는데 그쳤다.이후 해마다 돌아오는 정책자금 상환과 겹치면서 내년에 원리금 상환이 힘든 지경에 몰린 것이다.”

-42조원 투융자 사업과 해마다 지원되는 수조원대의 정책자금에 대한 비판도 많다.집행의 투명성이나 사후관리가 잘 안된다고 하는데.
“물론 정책자금으로 노래방·다방을 차리고 도시에 나간 자녀들의 하숙비를 대는 문제가 있었다.정부가 관리를 소홀히 한 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전체 문제로 돌리는 것은 곤란하다.42조원 투융자 사업의 성과도 많았다.이제는 웬만한 가뭄이나 홍수에도 흉년이 들지 않는다.수리·생산시설 등 농업기반이 선진화됐기 때문이다.그리고 과거 우리가 겨울철에도 상추를 즐길 수 있었나..”

-국내 농업이 발전했다지만 벼를 제외하고는 어떤 작물도 수확량이나 품질에 관계없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성패가 결정되는 전근대적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바로 이 점이 오늘날 농가부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도 하는데.
“공감한다.현재 가격이 폭락한 배추와 무우만 해도 지난해에는 가격이 좋았다.농민들은 그 생각만 한다.

배추는 9일 현재 5t트럭 물량 기준으로 경영비(생산비에서 재배자의 노동비를 뺀 비용)가 1백20만원선인데 90만원까지 떨어지면 정부가 폐기용으로 매입해 공급을 조절할 계획이다.

결국 대책은 철저한 농업 관측에 있다고 봅니다.전국의 농민들이 어떤 품목을 얼마 만큼 생산할 계획인지를 정부가 철저하고 신속하게 조사,공급이 넘치는지 아니면 부족한 지를 판단하고,나아가 예상 판매가격까지 농민들에게 사전에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농민들 스스로 공급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특히 고추 ·양파 ·마늘 ·배추 처럼 툭하면 파동이 나는 품목을 대상으로 농업 관측을 집중적으로 강화할 작정이다.”

-이번 주부터 칠레와 자유무역협정(FTA)4차 협상이 시작되고 내년에는 뉴라운드 논의가 본격화한다.결국 농산물시장의 추가 개방이나 관세문제가 또 초점이 될 것 같고,그러면 결국 우리가 수출해서 살 수밖에 없으니 다시 농업양보론이 나올 것도 같은데.
“효율을 중시하는 비교우위론자들은 쌀도 사다 먹자고 말하는 판이지만,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다.

제조업만으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만약 그렇다면 세계화를 주장하고 효율을 그렇게 중시하는 유럽국가들이 저마다 엄청난 보조금을 줘가며 농업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우선 쌀만을 놓고 보면 세계적으로 생산되는 쌀 가운데 우리가 먹는 단립종은 10%인 3천8백만t인데다,단립종 생산국가는 수요와 공급이 다들 빠듯하다.

80년대 초에 국제적으로 단립종의 쌀값이 두배로 급등했는데 이는 생산량이 단지 4% 남짓 준 결과였다.최소한의 농업마저 포기했다가는 자칫 국민을 굶길 지 모른다.”

-농가부채에 대해 끝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면.
“농가부채 해결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국민은 소수로 안다.하지만 농업은 단순히 농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 전체를 위해서 지원해야 하는 분야이며 이런 면에서 농업은 민족산업이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시위라는 형태로 표출하긴 했지만 이는 다른 부문의 집단이기주의와는 다르다고 본다.그리고 농가부채에 대한 지원도 이번이 마지막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만난 사람=이효준 경제부 기자

<한갑수 장관 경력>
1934 전남 나주 출생
1952 광주고등학교 졸업
1956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1958 고등고시 행정과 10회 합격
1972 농림부 농정국장, 유통경제국장
1976 국제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1979 제10대 국회의원(무소속, 나주-광산)
1991 환경처 차관
1992 경제기획원 차관, 남북 고위급 회담 대표
1993 한국산업경제연구원 회장
1994 동신대 객원교수
1995 한국가스공사 사장
2000 농림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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