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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맹인 안마사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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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논설위원

그녀는 21세에 시력을 잃었다. 뇌수막염으로 쓰러져 사경(死境)을 헤매다 일주일 만에 깨어나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 깜깜하고 막막한 현실에 울고불고 발악했다. 그래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맹인고등학교에 갔다. 거기서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법과 안마 기술을 배웠다. 졸업 후 안마시술소에 취직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첫발을 내디뎠던 직장은 그녀에게 지옥과 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술 취한 남성 손님들의 민망한 작태와 꿈이 없는 현실은 공포 자체였다. 그녀는 매일 울었다. 그러면 선배 안마사들이 타박했다. “안마사가 다 이런 거지, 넌 왜 별나게 구니?” 그때 알았다. 비장애인들이 밝은 세상에서 온갖 꿈을 꾸는 동안 선천적 장애인들은 체념하는 법부터 배우는 거라고.

 그러다 그녀의 손끝에 이상한 기운들이 구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인체는 신비했고, 그 호기심이 다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더 배우려고 선생님들을 찾아다녔지만 누구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못했다. 그녀는 안마원을 차리고, 아픈 손님들에게 손끝의 느낌을 일일이 물어가며 스스로 깨우쳤다. 그렇게 20여 년. 지금 그녀가 홀로 하는 안마방은 예약도 힘들 정도가 됐다.

 그런데도 그녀의 집엔 ‘안마방’이라는 상호만 보고 퇴폐영업을 문의하며 행패를 부리는 남자들 전화가 무시로 걸려온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사이버대학에 다닌다. 학위를 따서 시각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칠 작정이다. 기술을 발전시켜 안마를 물리치료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싶어서다. 그러면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까. 또 이런 직업 배경이 있으면 시각장애인들을 흔들어 깨워 꿈꾸게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녀를 만난 걸 행운이라 부른다. 제목은 잊었는데 예전 TV에서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뉴욕의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 어느 리조트에 휴가를 가서 안마를 받는다. 남자 맹인 안마사가 안마를 해주며 말한다. “당신의 고단함이 어깨 근육에서 그대로 느껴진다”고. 그녀는 이에 흐느껴 울며, 말 많고 잘난 남자친구를 차버리고 안마사를 사귄다. 그 영화를 보며 아픈 근육을 달래주는 사람을 찾아낸 주인공의 행운이 무척 부러웠다. 딱 그 행운이 내게 왔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녀의 꿈도 전달됐다. 우리나라에선 안마사 자격을 맹인에게만 준다. 자격 있는 안마사는 8000여 명. 그들은 안마시술소에 취업하든지 안마원을 차리는 게 진로의 거의 전부다. 최근 정부의 경로당 파견 사업 등이 있으나 월 100만원의 임시직이다. 자격증은 몰아주고 진로는 빈약하다. 기술을 심화할 체계화된 이론도, 배울 곳도 마땅찮아 기술 축적도, 전수도 잘 안 된다.

 이런 난맥상은 안마사가 시각장애인 직종이다 보니 재능 있고 여력 있는 민간이 신경 쓰지 않고,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지 않은 탓이다. 보건복지부 담당자도 이에 수긍하지만, “안마사 관리는 의료법, 수련은 고용노동부, 복지부는 일자리 지원 등 각기 맡은 일이 달라서 복합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공무원이 이렇게 말할 때는 해결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하긴 중증장애인 경제활동참가율이 20%(인구 전체 61.9%) 남짓이니, 정책당국은 일자리 수를 늘리는 것도 벅차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직업은 그 사람의 인생이고, 사람은 직업을 통해 꿈을 꾸고 희망을 품는다. 장애인의 직업도 숫자가 아닌 희망의 터전이 돼야 한다. 장애인 직업은 비장애인의 도움 없이는 발전하기 힘들다. 인체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하고, 실전을 가르치는 환경을 마련하고, 안마를 물리치료가 됐든 관광상품이 됐든 개발하고 시장화하는 것은 비장애인이 나서야 한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협업으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길도 열리는 것이다.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다. 이맘때면 장애인 대상 범죄를 잡아내고, 장애인 고용 대책을 발표하는 등 반짝 이벤트가 벌어진다. 이런 반짝 관심이라도 길게 늘이면 그녀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