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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 년 전엔 신사의 스포츠 선수는 모직옷 심판은 연미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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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호 13면

뉴욕 양키스의 전통적인 핀스트라입 유니폼 차림의 베이브 루스.

야구 시즌이 돌아왔다. 오늘날 야구는 남녀노소 다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경기다.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처음 야구장을 찾은 사람들은 누구나 이 난해한 경기에 쉽게 몰입하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야구의 재미를 느끼는 첫 단계는 유니폼이다. 흰색 유니폼의 그 순수함을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갖고 있는 어른들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김신의 맥락으로 읽는 디자인<5> 야구 유니폼

1970년대 야구 유니폼. 티셔츠 형태의 상의와 벨트 없는 하의, 나일론과 코튼의 결합으로 잘 늘어나고 몸에 붙는 스타일로 교체됐다.

선수들 사이의 격렬한 부딪침이 많아 보호 장비가 많은 미식축구와 아이스하키를 제외하면, 대개 유니폼은 단순하다. 대표적인 구기인 축구·농구·배구·핸드볼·테니스·탁구 등을 떠올려 보라. 티셔츠에 반바지, 양말이 전부다. 그러나 야구는 어떤가? 모자, 헬멧, 셔츠, 언더티, 벨트가 있는 바지, 스타킹까지. 다른 스포츠가 민첩하고 격렬한 몸의 움직임을 위해 가능한 옷을 단순화하고 몸을 많이 노출시킨다면, 야구 유니폼은 얼굴과 팔뚝 정도를 제외하고 몸을 온전히 가린다. 게다가 편안한 티가 아니라 셔츠라니. 어떻게 이런 독특한 유니폼이 정착됐을까.

반바지를 입은 1970년대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

1845년, 세계 최초의 야구팀인 뉴욕 니커보커(Knickerbocker) 야구 클럽이 탄생했다. 이들이 1858년 최초의 야구 유니폼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 야구복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중요한 단서 하나가 발견된다. 바로 칼라가 달린 셔츠다.

니커보커 야구팀은 순수 아마추어로서 상인, 변호사, 은행 직원, 보험회사 직원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비교적 삶이 여유로워서 늦은 오후에 자유시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유니폼 소재로 값싸고 운동하기 편안한 면이 아닌, 비싸고 불편한 모직을 선택했다. 노동계층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그들에게 야구는 점잖은 신사의 스포츠였던 것이다. 당시 심판들은 연미복을 입고 테이블에 앉았다고 한다.

컬러가 화려한 1970년대 휴스턴 애스트로스 유니폼.

오늘날 야구복 상의는 과거의 셔츠에서 칼라만 사라진 형태다. 한때 티셔츠 야구복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다시 셔츠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야구팬들은 덜 편해 보이는 셔츠 타입에 더 깊은 애정을 느낀다. 영화나 만화에서 야구선수가 셔츠 단추를 풀어헤친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분명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신사의 스포츠라는 의미는 더 이상 없지만, 셔츠는 야구의 아이덴티티이자 매력임에 분명하다.

니커보커 클럽 이후로도 160여 년의 야구 역사에서 셔츠와 언더티, 긴 바지가 계속 유지된 것은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의 특징 때문이다. 야구는 정적인 스포츠다. 투수와 포수를 제외한 나머지 야수들은 타자가 공을 때리기 전까지 대개 자기 자리에 서 있다. 게다가 공격수들은 벤치에 앉아 있다. 축구 선수가 한 경기에서 10~20km 정도를 달리는 것과 비교하면 야구는 노는 경기 같다. 그만큼 야구 선수의 몸은 금방 식을 수 있는 것이다. 야구는 쌀쌀한 봄에 시작해 투수들이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공을 던져야 하는 겨울 문턱에서 끝난다. 따라서 움직임이 적은 야구는 선수들의 유니폼에 좀 더 옵션을 주어야 한다. 셔츠 소매가 짧아지는 대신 긴 팔 언더티가 등장한 이유다.

야구 유니폼에서 특이한 것은 스타킹의 존재다. 스타킹은 1868년 창단된 최초의 프로야구팀인 신시내티 레드스카팅스가 니커스(knickers)라는 바지를 선보이면서 나타났다. 니커스는 품이 넓고 무릎까지만 내려왔다. 무릎 바로 아래까지는 스타킹을 신었다. 그 전까지 긴 바지를 입어서 뛰는 데 불편했던 요소를 이 스타킹이 완전히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스타킹은 기능성 이상의 큰 혁신이었다. 왜냐하면 당시로는 매우 충격적인 패션이었기 때문이다. 클럽의 대표는 남성의 종아리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 새로운 패션이 매우 남성답다고 여겼다. 그러나 여성들은 신시내티 선수들의 적나라하게 노출된 다리 선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많은 사람이 이 새로운 룩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하고 반대했지만, 선수들에게 인기가 높아 곧 대부분의 클럽이 따라 했다.

스타킹은 다시 한번 야구 유니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80년대 야구 유니폼은 특이하게도 수비 위치별로 다른 색과 모양의 옷을 입었다. 예를 들어 1루수는 진홍색과 흰색이 번갈아 나타나는 줄무늬 셔츠와 모자를 썼다. 유격수는 고동색 유니폼을 입었다. 단 스타킹만은 같은 색으로 신었다. 따라서 팀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타킹 색이었다.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를 비롯해 보스톤 레드스타킹스,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와 같은 초창기 프로팀의 이름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펑퍼짐한 셔츠와 니커스 타입의 바지, 무릎 아래까지 올라온 스타킹은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유니폼을 지배한 스타일이 되었다. 1950년대 이후 니커스 스타일이 사라지고 스타킹의 길이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70년대부터 야구 유니폼에 패션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우선 면과 나일론을 섞은 유니폼이 처음 등장했다. 신축성 있는 소재여서 그런지 이때부터 유니폼은 몸에 딱 들러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는 최초로 단추가 달리지 않은 티셔츠 타입의 상의와 벨트가 없는 바지를 선보였다.

이렇게 몸에 들러붙는 새로운 스타일의 옷은 선수들을 대단히 섹시하게 보이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메이저리그 모든 팀들이 이 룩을 따라 했다. 동시에 스타킹은 끈처럼 얇아졌는데, 이 역시 선수의 다리를 더욱 길게 보이도록 해주었다.

동시에 컬러가 굉장히 풍부해졌다. 휴스턴 에스트로스 같은 팀은 무지개색을 유니폼에 도입하기까지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반바지에, 사라진 지 오래 된 칼라가 있는 셔츠 유니폼을 디자인했다는 점이다. 이는 60년대 말부터 음악과 영화 등 미국 대중문화에서 기존 질서를 깨고 반문화, 평화,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시대정신과 맞물린다.

그러나 재미있는 건 각종 미디어가 선정하는 최악의 유니폼은 대부분 화려한 색상에 딱 들러붙는 티셔츠, 벨트 없는 바지를 입었던 바로 1970년대의 유니폼이라는 사실이다.

최근의 가장 큰 변화는 옷이 다시 예전처럼 헐렁해지고 스타킹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전통 유니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최근 야구 유니폼은 정신적으로 해이해진 것처럼 보인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늘 말썽을 피우는 것으로 유명한 매니 라미레즈 같은 선수는 힙합 바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헐렁한 바지를 입고 타석에 등장하는데, 매우 불량해 보인다. 이런 변화는 메이저리그가 약물에 취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그래서일까. 가끔 타이트한 옷에 사진 속 베이브 루스처럼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을 신은 선수를 보면 왠지 남다른 각오를 다진 것 같다. 옷은 마치 언어처럼, 선수의 모든 것을 판단하게 하기도 한다.



김신씨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7년 동안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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