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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구연으로 자녀와 소통하는 아버지들

중앙일보

입력

정재헌 판사(왼쪽)와 가족들이 동화구연을 할 때 사용하는 인형을 손에 끼우고 함박 웃음을 짓고 있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9월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돼 화제가 됐던 초등학생의 시다. 아이의 눈에 비친 아빠의 존재감이 강아지나 냉장고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대다수 아버지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녀와 소통하지 않고 권위만 내세우는 내 모습 같아 씁쓸하다”며 공감했다.

 이들과 전혀 다른 아버지들이 있다. ‘전국 아버지 동화구연대회’ 입상자들의 모임인 ‘동화구연아버지회’ 회원들이 그 주인공이다. 성대모사에 1인 다역 연기까지 섞어가며 동화책을 맛깔나게 읽어줘 아이들과 마음의 벽을 단박에 허무는 아버지들이다. 이들은 “아무리 일이 바빠도 애들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겠냐”며 “동화구연으로 아이들과 눈높이 맞춰가며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이들 권유받아 학원 다니며 대회 준비

 대법원에 근무하는 정재헌(43) 판사는 “동화구연 덕분에 아이들이 아빠를 한층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 판사는 2010년 ‘전국 아버지 동화구연 대회’에 참가해 대상을 수상했다. 이 대회에 참여한 건 아이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동화구연 학원에 다니고 있던 큰 아이 민규(서울 반포초 5)는 물론 둘째 석현(서울 반포초 2)이까지 “아빠가 이런 대회에 나가면 재미있을 것 같다”며 참가를 적극 권했다.

 정 판사는 “평소 자정이 다 돼야 겨우 집에 올 정도로 업무가 바빠 대회 준비에 도저히 자신이 없었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니 참가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대회에서 선보일 동화 대본도 직접 썼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에게 컴퓨터 작동법을 배우며 생긴 에피소드를 창작했다. 구연 연습은 일부러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했다. 정 판사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어눌한 사투리를 성대모사하면 민규와 석현이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는 “아이들 앞에서 아빠의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니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대회 이후에는 ‘동화구연아버지회’ 회원들과 보육원이나 양로원으로 봉사 공연도 다니고 있다. 이때도 항상 아이들과 함께 한다. 석현이는 “아빠가 할아버지 분장을 하고 홍당무를 파는 역할을 했는데 정말 웃겼다”며 자랑했다.

 정 판사는 “동화구연을 한다고 해서 성우처럼 능수능란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하는 것 자체를 좋아해요. 동화구연을 기능적으로 전문가처럼 잘하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설명했다.

“동화 속 영식이처럼 해야 돼” 강요 금물

 동화구연을 통해 불편했던 자녀와의 관계를 개선한 사례도 있다. 김민수(가명·50)씨는 “큰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쯤 되자 말수가 적어지고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만 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타일러도 보고 야단도 쳐봤지만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김씨는 보육원으로 동화 구연 봉사를 갈 때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해 공연의 한 코너를 맡아 아들과 2인 동화로 꾸며보기도 했다. 김씨는 “공연을 3회 정도 하니까 아이가 ‘다른 프로그램도 더 할 수 없겠냐’고 묻더라고요. 공연 연습도 같이 하고 대사를 자주 주고 받다 보니 실생활에서도 대화가 부쩍 늘었다”며 기뻐했다.

 동화구연아버지회 편사범 회장은 “동화구연은 자녀가 어릴 때 부모와 대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추천했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부모가 동화구연을 해주기 쑥쓰럽고 어색해진다는 의미다. 편 회장은 “자녀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며 부모와 이야기 나누는 게 재미있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인식시켜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화 구연을 할 때 주의할 점에 대해서도 짚어줬다. 첫째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거부 반응을 보이기 쉬워서다. 편 회장은 “길이가 짧고 내용이 재미있는 이솝우화 등을 택해 실감나게 읽어주라”고 권했다. 동화를 마무리 하면서 “그러니까 너도 이 이야기에 나오는 영식이처럼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라”며 부모의 시각을 덧붙이는 것도 금물이다. 편 회장은 “부모의 시각을 강요하면 아이가 동화를 듣고, 등장인물 A도 되보고, B도 되보며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뺏어버리는 일”이라며 “동화구연을 마치고 느낀 점, 깨달은 점 등을 말해보라고 시키는 것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 아빠가 들려주는 동화구연 노하우

1. 길이가 짧고 내용이 재미있는 이솝 우화로 시작한다.

사자와 토끼, 곰과 다람쥐 등 등장 인물의 성격이 극명하게 대비될수록 성대모사가 편하다. 사자와 호랑이, 할머니와 아주머니 등 목소리 톤이 비슷한 등장인물이 여럿 등장하면 듣는 이들이 지루해지기 쉽다. 등장인물이 3~4명 이내로 적어야 이야기에 집중하기도 좋다.

2.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너도 주인공처럼 하라”며 부모의 시각을 덧붙이는 건 금지 한다.

아이가 여러 등장인물이 되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행동이다.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상상을 해볼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는 태도를 갖는 게 좋다.

3. 이솝우화→생활동화→위인전→아빠의 생활 이야기 등 다양한 스토리 들려주라.

미취학 아동이라면 이솝우화처럼 간단한 이야기를, 초등 저학년 자녀에게는 생활동화를, 초등 고학년이라면 위인전을 읽어주는 게 적합하다. 낭독이 익숙해지면, 아빠의 생활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간단히 메모한 뒤 아이에게 실감나게 들려주는 것도 아이와 공감대를 넓힐 수 있다.

4. 어색하고 쑥쓰럽다고 술의 힘을 빌리는 ‘음주 동화’는 절대 금지다.

술을 마신 뒤 어눌한 말투와 과장된 몸짓으로 동화구연을 해주는 아버지도 적지 않다. 이런 일이 잦아지면 아이가 학교에서 발표를 하는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해야 할 때, 아버지의 술 취한 모습을 모방하게 된다.

5. 성대모사 어설프게 느껴지면 만화영화를 참고하라

케이블 TV에서 방영되는 만화영화를 한두편 감상하면서 성우의 목소리 톤을 유의해 들으면 성대모사에 도움이 된다. 성우가 만화 인물의 성격에 따라 목소리 굵기와 빠르기가 어떻게 조절하는지 참고해 동화구연에 적용하면 된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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