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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현 기자의 문학사이 ⑩ 테마 시집 『왜 사랑하느냐고 묻거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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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오른쪽)이 승민에게 이어폰을 꽂아주는 장면.

스크린에는 영화 ‘건축학개론’이 흐르고 있었다. 스무 살 서연(수지)이 동갑내기 승민(이제훈)의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CD플레이어가 뱅그르 돌면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흘렀다. ‘이젠 버틸 수 없다고/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에 기대어/….’

 음악이 실어 나르는 첫사랑의 추억으로 극장 안은 팽팽했는데, 거의 앓는 소리를 내는 남성 관객도 있었다(많은 경우 첫사랑은 남성에게 더 치명적이다!).

 음악이란 종종 사랑의 대명사다. 특정 음악은 특정 시간 특정 장면을 불러낸다. 음악에 기대 사랑을 추억하려는 마음을 ‘시심(詩心)’이라 부르려 한다. 음악이란, 본디 시의 본향이니까. 해서 ‘건축학개론’은 어떤 시심을 탐색하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사랑을 건축에 비유했거니와, 우리 시대 시인은 이미 그 사랑의 건축학을 꿰뚫은 바 있다. 최근 나온 테마 시집 『왜 사랑하느냐고 묻거든』(문학사상)은 김용택·이영광 등 시인 57명이 서술한 사랑의 건축학개론이다.

 ① 기초 공사

 ‘바람도 없는데/창문 앞/낙엽이 흔들리네요/…’(김용택 ‘바람’)

 바람도 없는데 낙엽이 흔들린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마음이 요동친다. 사랑이란 까닭 없는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고백하려고 자음과 모음을 연마(이민하 ‘당신이라는 과학’)’했고, 마침내 당신이 웃는다. 요동치는 내 마음에 당신이 웃었다. 됐다, 사랑의 기초 공사는 그걸로 됐다.

 ② 완공

 ‘사랑한다는 것은/꽃다발을 바치는 것/저녁 늦게까지 온몸이 꽃다발이 되어/…’(고영민 ‘꽃다발’)

 사랑이 완공되면, 황홀해라, 온몸이 꽃다발이 된다. 그 황홀함을 매일매일 바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완공된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황홀, 눈부심/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함/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음/어쨌든 좋아서 죽겠음/…’(나태주 ‘황홀극치’)

 ③ 붕괴, 그 후

 ‘우리가 두 마리 어지러운 짐승으로 불탔을지라도/…/한 짐승은 사람이 되어 떠나고,/…/한 짐승은 짐승으로 남았으므로/…’(이영광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첫사랑은 대개 이별을 동반한다. 짐승처럼 서로에게 이끌렸으되, 한 짐승은 끝내 정신을 차리고 사랑을 버린다. 짐승의 사랑은 인간의 기억으로 남는다. 하지만 기억에는 정류장이 없다. 내릴 곳 몰라 헤매다 문득 그리움이라는 종착점에 다다른다.

 영화가 끝나고 ‘기억의 습작’이 다시 흐를 때, 사람들은 눈물을 훔쳤던가. 그랬던 것도 같다. 붕괴된 사랑을, 그리움으로 굳어버린 그 첫사랑을 어찌 눈물 없이 추억할까.

 ‘사랑한다면/눈물의 출처를/묻지 마라/정말로 사랑한다면/눈물의 출처를/믿지 마라’(박후기 ‘빗방울 화석’)

 그리움이란 결핍의 마음이다. 사랑이 무너져 그리움이 되었다. 그렇게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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