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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방 미혼모’의 비극… 무관심도 공범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5호 31면

4·11 총선을 앞두고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과 김용민 막말 파문으로 여야의 싸움이 한창이던 5일, 충격적인 사건 기사 하나가 언론매체를 장식했다. 서울 송파구의 한 PC방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은 뒤 곧바로 비닐봉지에 담아 화단에 버린 피의자 정모(26)씨가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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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다룬 신문·방송의 헤드라인은 하나같이 ‘게임중독’에 방점을 찍었다. 정씨는 사건이 벌어진 지난달 25일 양수가 터지는 등 출산 임박 사실을 알았는데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 아이를 낳아 버린 뒤에도 게임을 계속했다. 정씨가 게임 중독자임을 말해주는 확실한 ‘팩트’다. 하지만 게임중독이 곧 어처구니없는 범죄를 일으킨 ‘원인’이었는지는 좀 더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정씨의 사연을 들여다볼수록 더더욱 그렇다.

정씨의 가정은 불우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시절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정신질환을 얻어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수차례 가출을 반복하면서 정씨는 고교과정을 겨우 마쳤다. 이후 띄엄띄엄 편의점·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제대로 된 거처와 직업 없이 거리를 떠돌았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한다.

가정과 사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정씨를 그나마 받아준 건 게임 세계였다. PC방에서 채팅을 하거나 게임에 접속했을 때만큼은 답답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5월 아이 아버지인 남성을 만난 것도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였다. 지난해 말 정씨의 임신 사실을 안 동거남은 결별을 요구했고, 정씨는 PC방을 전전하는 처지가 됐다. 무일푼인 그녀는 함께 게임을 하던 사람들에게 ‘배가 고프다’며 3만~5만원씩을 보내달라고 호소해 게임비와 숙식에 충당했다.
그러나 게임을 떠난 현실 세계에선 아무도 정씨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사건이 벌어진 뒤에도 정씨는 피 묻은 바지를 입은 채 게임을 하거나 거리를 오갔다. 그런 그녀에게 병원행을 권하거나 속사정을 물어본 사람도 없었다. 경찰 관계자는 “경제적 능력 없이 철저히 혼자인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을 감당하기는 어렵다고 본 것 같다”고 전했다.

경찰은 영아 시체가 발견된 지난달 27일 이후 인근에 설치된 폐쇄회로TV(CCTV) 영상 추적과 탐문 등을 통해 정씨를 붙잡았다. 영아 살해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정씨는 현재 한 여성보호센터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다. 물론 정씨의 죄는 무겁다. 치료감호가 끝난 뒤 재판에 회부되면 법정구속을 당하고, 중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관계자조차 ‘불쌍하다’는 말을 되풀이할 만큼 이번 사건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다. 우리 정부는 미혼모를 보호하고 무료로 돌봐주는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게임중독에 대해 비용 부담 없이 상담할 창구도 있다. 노숙인 등 오갈 곳 없는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공공시설도 많다. 거리를 떠돌던 정씨에게 삶의 고비마다 누군가 다가가 얘기를 건넸다면 어땠을까. 이런저런 보호시설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만 알려줬어도 끔찍한 비극은 예방 가능했을 것이다. 게임중독보다 무서운 건 무관심한 사회다. 사회적 약자·패자를 보듬지 못하면 비극은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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