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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4. 근심 없는 나무들 ③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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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콤하고 황홀한 욕정이 사학하다고 어찌 미리부터 속단한단 말인가. 나는 땀범벅이 되어 육욕에 탐닉했고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뚱어리가 붕, 하고 떠오르는 순간과 만났다. 그리하여 별똥별처럼 아스라이 사라지는 내 의식을 그만 놓아버리고 말았다.

[일러스트=이용규]

물속처럼 감감한 방안에 달빛이 스며들어왔다. 나른한 몸은 천근만근인데 의식은 맑기만 하다. 다시 눈 뜬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목격했다. 겉으로야 담담하게 받아들였지만 하나같이 놀라운 일들이었다. 잠시나마 눈을 붙여둬야 한다. 아침부터 또 다른 충격들을 만나게 될 테니까.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려 잠을 청한다. 부러 소리 내 코를 곯아본다. 나는 이제 쓰러 넘어진 고목이다. 그것도 반은 썩어문드러진 고목. 그러므로 죽음 같은 잠을 자게 돼 있다. 그런데 몸이 나른하면 할수록 의식은 더 선명해진다. 검은 고목나무에 노란 꽃이 피어난 것 같다. 나는 그 꽃에 먹칠을 한다. 검게 변한 꽃이 이내 더 샛노래진다. 다시 먹칠한다. 이제는 연분홍빛깔로 변한다. 연꽃인가 했더니 허화(虛花)다. 가짜 꽃도 분수가 있지. 망측하게도 여인의 음부다. 행자시절 짓궂은 도반들이 숨어서 보던 춘화도가 되살아났다. 하초가 뜨거워지면서 멍멍하다. 사춘기도 아니고 사십을 바라보는 중이 이 무슨 주책이란 말인가. 지우지 못할 꽃이라면 베어버리자. 나는 내 의식에 칼날을 세우고 항마검(降魔劍)을 날린다. 똑 떨어진 꽃봉오리가 방안에 둥둥 떠돌아다닌다. 꽃봉오리가 문틈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킨다. 여명의 달빛을 타고 누각까지 흘러간 나는 말을 타고 치달린다.

삼거리를 지나 도장바위 골짜기에 다다랐다. 뒤따라오던 새벽빛은 이 협착한 골짜기에서 주춤 물러선다. 연못을 거쳐 약초골 공방 유도화 군락지 근처에 말을 매었다. 여기서부터는 가파른 산길이다. 엊그제 초저녁 나는 전추산의 등에 업혀서 이 산길을 탄 적이 있다. 나는 좁은 산길을 가뿐하게 오른다. 이마에 땀이 배어날 때쯤 폭포소리가 들린다. 울창한 참나무 숲속으로 흘러내린 산길은 바위투성이다. 이끼 낀 고목 냄새가 익숙하다. 그제 저녁 내가 알 수 없는 힘에 붙들려 온몸이 굳어 혼절했던 바로 그 지점이다. 나는 바윗길을 타고 내려간다. 나를 막던 힘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다.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다.

그때였다. 정체모를 거대한 물체들이 시퍼런 불을 켜고 내 앞을 비춰주었다. 그 빛에 감싸인 내 몸이 반투명하게 보였다. 조롱조롱 매달린 때죽나무 열매는 보석으로 변했다. 빛줄기는 장쾌한 폭포 옆 산막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통나무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둠침침한 실내 가득 송진 냄새가 진동했다. 유도화 향기도 뒤섞여 있다. 흐릿한 실내풍경을 살피고 섰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빛다발이 쏟아져 내렸다. 그 아래로 눈부신 흰옷차림의 여인이 보였다. 여인은 궁창과 연결된 동아줄을 당겨 기둥에 고정했다.

"어서 오라. 수고롭고 무거운 그 짐을 내려놓고 내 품으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

신묘한 울림을 지닌 음성이었다. 두 팔을 벌리고 선 여인의 자태는 황홀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해사했고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어깨를 거쳐 가슴까지 흘러내렸다. 나는 미끄러지듯 여인의 품으로 다가가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뺨으로 전해지는 여인의 가슴은 풍성했고 그 향기는 내가 주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아득하게 느끼며 혼미한 세계로 휘말려가고 있었다.

육욕의 달콤함이여. 내 몸 안에서 서른아홉 해 동안 잠들었던 본능이 깨어 일어나 꿀을 빨고 있구나. 애욕의 심연에 뿌리박은 떨리는 몸은 불덩이보다 더 뜨겁도다. 극도로 절제해온 수행자의 청정한 몸이 지글지글 타들어가며 뿜어내는 이 향기는 침향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로다. 이처럼 순도 높은 쾌락이 내 살과 뼈에 숨어있었다니. 나는 여태껏 이 놀라운 쾌락을 눈 감겨두거나 발 묶어놓고 숱한 계율로 나를 칭칭 동여매놓았었구나. 산더미처럼 쌓인 책 속에서 캐내는 진리의 말씀은 내 정신을 살찌웠고 명상으로 다다른 평정심은 내 정신을 고양시켰어라. 하지만 살갗에 촉감으로 묻어오는 이 육욕의 향연에 어찌 비할 수 있으리오.

사문 고타마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 마왕(魔王) 파순은 세 딸을 보내 유혹했다. 고타마는 외쳤다. ‘칼날에 발린 꿀은 혀를 상하게 하고 사악한 욕정은 독사의 머리와 같도다. 내 이미 모든 유혹을 뛰어넘었다. 너희들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물러가거라.’ 마왕의 세 딸들은 추한 노파로 변해 탄식하며 물러갔다.

고타마는 칼날에 발린 꿀을 빨다가 혀를 다친 적이 있었던 게 확실하다. 독사 머리 같이 사악한 욕정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을 게다. 그리하여 그 폐해와 독성을 익히 알았으므로 주저함 없이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 이 달콤하고 황홀한 욕정이 사학하다고 어찌 미리부터 속단한단 말인가. 나는 땀범벅이 되어 육욕에 탐닉했고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뚱어리가 붕, 하고 떠오르는 순간과 만났다. 그리하여 별똥별처럼 아스라이 사라지는 내 의식을 그만 놓아버리고 말았다.

요란한 곤줄박이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궁창이 도로 닫혀있었으므로 실내는 어두웠고 몇 시나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궁창을 열쳤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벌거숭이 내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잽싸게 옷을 주워 입었다. 실 내 중심에 화덕이 놓였고 부뚜막 위에 찬물 한 대접이 보였다. 나는 그 물을 마셨다. 육중한 통나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곤줄박이들이 종종걸음으로 치며 때죽나무 열매를 쪼아 먹느라 부산했다. 여름 한낮의 햇살이 그늘 속을 후벼 파 들어왔다. 나는 몇 걸음 내딛어 바위벼랑길과 맞닥뜨렸다. 습기 찬 나무둥치마다 모시조개처럼 희고 둥근 버섯들이 돋아나 있었다. 나는 비로소 새벽녘에 내 발밑을 밝혀줬던 발광물체들의 정체를 파악했다.밤에 빛을 토해내는 귀신버섯 군락지였던 것이다.

바위벼랑길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햇살이 부서지는 폭포 웅덩이에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어서 뒷걸음질 쳐 바윗돌에 앉았다. 나는 사내였다. 먹물 옷에 가려져 있던 사내가 저 통나무집에서 스스럼없이 수컷본능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저 여인과 마주 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 빛이 없는 동굴 같은 데로 숨어들고 싶다. 그것이 내 안에 배태된 죄의식이라는 걸 깨우쳐준 이가 여인이었다.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여인이 나를 폭포 웅덩이로 이끌고 가 머리를 씻어주었다.

"이로써 거듭났느니 모든 미움은 씻은 듯 사라지고 사랑의 눈이 열렸도다."

크고 깊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여인은 입을 다문 채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서 말을 하고 있었다. 대식국 잡희들이 인형을 가지고서 하던 복화술(複話術)과 흡사했다. 사람을 조복시키는 기운으로 충만한 음색이었다. 새벽녘 그 풍만하고 기름진 몸에서 나던 향긋한 살 냄새는 온데간데없고 기품어린 여사제가 돼 있었다. 어제 새벽 동굴 예배소에서 집전했던 바로 그 여사제였다. 여사제의 모습에서 가온의 얼굴을 찾아내려 하지만 별반 닮은 데가 없다. 열여섯 살이나 된 가온을 낳은 엄마 같지가 않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볼지어다. 나는 사랑이니 누구든지 나를 거치면 마음속 켜켜이 서린 미움의 병이 씻은 듯 치유되느니."

젖은 내 머리를 소매로 닦아주던 여사제가 내 두 뺨을 손으로 감싸며 읊조렸다. 장쾌한 폭포수가 쏟아지는 곳이라서 그 말은 효험 있게 들렸다.

여사제가 내 손을 잡아 이끌어 때죽나무 그늘 아래 앉혔다. 산막으로 올라갔다 돌아온 여사제는 보자기에 싼 광주리를 내 앞에 펼쳐놓았다. 잡곡밥과 나물반찬, 보리차처럼 보이는 마실 거리가 담긴 유리병이 나왔다. 유리병을 물에 담가놓고서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었다. 소풍 나와 먹는 도시락처럼 맛났다. 유리병에 담긴 보리음료를 나눠 마셨다. 은은한 향기와 쓴 맛이 밴 차가운 음료를 마시자 살짝 취기가 돌았다.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자주 만들어 마시던 맥주라고 했다. 맥아즙(麥芽汁)에 홉이라는 향료를 넣고 숙성시키는 거란다.

"카라코룸에 갔었습니까?"

"7년을 살았지. 황족의 일원이 되어."

"대단합니다. 그런데 홉이라는 향료가 여태 남아있었나요?"

"검모포에 드나드는 대진국 상인들에게서 구한 것이지."

"이 마을에서 못 구하는 건 없군요. 개경이나 강도가 부럽지 않겠습니다."

"물질을 부러워하면 정신세계가 사막으로 변하는 법."

"아무튼 자꾸 당기네요. 오래 묵은 갈증을 해소하는 신비한 음료로군요."

나는 벌써 두 병째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폭포 웅덩이 건너편에서는 한 무리의 고라니 가족이 내려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을 마시고 있었다.

1231년 8월 몽골군이 쳐들어왔다가 이듬해 정월 물러가면서 많은 고려 여인들을 붙잡아갔다. 전추산의 누이동생 여옥도 그 가운데 포함돼 있었다. 열다섯 살, 이 소녀는 또래들보다 올되어 실팍하고 바지런했다. 몽골군 총사령관 살이타이의 군사(軍師) 어르글의 소유물로 배정되었다. 어르글은 산봉우리라는 뜻의 이름으로 지혜로운 늙은이였다. 몽골군들은 반항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여 기름을 짜냈다. 그 기름을 불화살로 쓰며 공격했다. 소름끼치는 만행이었다. 그런 야만인들 속에도 문명한 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어르글은 손녀딸 같은 여옥을 끼고 살면서 수족처럼 썼다. 처음에는 혀를 깨물고 죽으려 했지만 모진 게 사람 목숨이었다. 어르글 노인의 자상함에 이끌려 이동식 천막 생활에 적음해갔다. 어르글 노인은 여옥에게 아낌없이 선물을 주었고 틈틈이 글도 가르쳤다. 몽골문자와 한자는 물론 로마자도 알려주었다.

"빛나는 사람 여옥아, 수 만 리 정복전쟁에 수행하면서 나는 너무 늙어버렸다. 이번에 돌아가면 나는 은퇴하여 오고타이 다칸(大汗:황제)이 계시는 수도 카라코룸으로 간다. 나는 다칸의 황족들과 아주 가까이 지내는 사람으로 카라코룸 황궁 옆에 어엿한 저택이 있다. 너를 정실로 대우하고 그 집을 물려주마. 무지개 나라 고려 정복전쟁에서 너를 얻은 건 노년의 즐거움이로구나. 네가 원하면 서경(평양) 네 가족들을 데려와 함께 살 게 해주련다."

적장의 작전참모지만 마음씀씀이가 가히 정을 줄만했다. 실제로 어르글 노인은 카라코룸에 돌아가자마자 여옥 앞으로 저택과 가축들을 넘겨주었다. 그때는 수태한 여옥이 만삭 때였다. 어르글에게는 장성한 아들들이 있었지만 모두 호탄과 남러시아 정복전쟁에 나가고 없었다.

한 겨울에 여옥은 계집아이를 낳았다. 티베트 라마승이 와서 축복해주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늙은 작전참모 어르글은 라마승에게 답례로 낙타 한 마리를 보시했다. 소르각타니 베키 대부인 또한 몸소 어르글의 저택을 찾아 축복기도를 해주었다. 그미는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의 아내였다.

"이 아이는 영안(靈眼)이 열렸구나. 먼 동방 무지개 나라 고려에 이 아이가 심은 밀알이 싹트고 열매 맺겠다. 일찍이 우리 구주 예수께서 서방정토 예루살렘 말구유에서 탄생하실 때 창공의 빛난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 세 분이 있었지. 그들의 인연으로 인하여 오늘 이 검은 자갈밭 카라코룸에 동방의 빛이 재림했도다. 내 기꺼이 이 아이의 대모(代母)가 되어 주리라."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가져온 베키는 갓난아기의 손목에 묵주를 걸어주고 이마에다 성호를 그었다. 그미는 독실한 경교도였던 것이다. 칭기즈칸의 사후, 베키의 남편 톨루이가 2년간 임시 대칸으로 있었으니 베키는 황후나 다름없었다. 황족 가운데 가장 현명한 여인이었던 그미가 경교도가 된 건 집안 내력이었다. 그미는 칭기즈칸과 연합군을 만든 외몽골의 케레이트 왕 토크릴의 조카딸이었는데 케레이트는 서방 투르크의 영향을 받아 지배층이 모두 경교(네스토리우스교)를 믿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집으로 시집온 베키는 기도하고 찬양하는 나날을 보냈다. 얼굴은 맑았고 생각은 깊었다. 온유한 풍모, 지혜로운 그미의 언행에 감화 받은 사람들이 그미가 세운 예배당에 나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황족들 가운데 다수가 경교도가 되었다.

"어질고 현명한 대부인이시여! 이 늙은이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톨루이 대칸께서 서거하셔서 경황이 없을진대 이렇게 몸소 오셔서 축복해주시고 대모까지 되어주시다니요."

어르글의 노안에 이슬이 맺혔다. 형 오고타이에게 양위한 톨루이는 황제와 함께 중국 원정에 나갔다가 형 오고타이가 병을 얻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죽었다. 금나라의 원혼들이 오고타이를 병나게 했으므로 가족 가운데 하나가 제물이 돼야 낫는다는 무당의 말을 듣고서였다.

"무당의 말은 심히 어리석었으나 내 남편의 희생정신은 고귀했지. 그이가 경교를 믿었더라면 넋 나간 무당의 망발 따위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게다."

십자가 묵주 외에 화려한 장신구 하나 달지 않은 간소한 흰옷차림의 베키는 남편이 돌아간 하늘을 우러렀다. 사람이 죽고 사는 전장에서 뼈가 굳어온 어르글은 무당이고 경교고 라마교교 모두 허황된 정신질환으로 여겼다. 그가 본 이 세상은 욕망이 충돌하는 공간이었고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는 세상이었다. 강한 자가 독식하고 힘에 부치면 잃는다. 늙으면 누구나 죽고 그 다음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죽은 자들만이 아는데 죽은 이는 말이 없었다.

"현명하신 대부인이시여. 톨루이 가문을 잇는 몽케, 쿠빌라이, 아릭 보케 그리고 훌레구, 이렇게 네 분 아드님들을 축복합니다."

어르글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베키 대부인은 네 아들 모두를 경교도로 키워냈는데 천하의 사람들이 앞 다퉈 그들을 따랐다. 모두가 대칸에 오르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고맙구나. 아기 이름은 지었더냐?"

"기를레로 지었습니다."

"빛나는 사람! 매우 적절한 이름이다."

"제가 아기엄마 여옥을 부르던 이름인데 여옥보다 더 빛나지 뭡니까?"

"무지개 나라 고려 사람들은 살결이 희고 곱다. 내 손녀딸들을 고려 왕자에게 시집보내 기를레 같은 외손을 보고 싶구나."

베키의 축복을 받은 기를레는 무럭무럭 자랐다. 돌잡이 때 상에 붓과 동전, 실타래, 묵주를 올려놨는데 묵주를 집어 들었다. 베키 대부인의 입이 귀에 걸렸음은 물론이었다. 베키 대부인은 기를레를 예배당 데리고 가서 놀게 했다. 여옥도 자연스럽게 예배당에 나갔고 멀리 해 뜨는 동쪽나라를 향해 기도했다.

기를레가 다섯 살 때 어르글이 죽었다. 호탄과 남러시아 정복전쟁터에서 돌아와 있던 두 아들이 여옥의 재산을 서로 빼앗으려 했다. 베키 대부인이 나서서 말렸다. 한동안 잠잠해진 그들이 이제는 여옥을 취하려고 다퉜다. 스무 살밖에 안된 이 젊은 미망인은 의기양양한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사내들의 정복욕을 불사르기에 충분했다. 죽은 남편의 소생들은 시도 때도 없이 집에 드나들며 때로는 유혹하고 때로는 겁박했다. 그때마다 여옥은 기를레를 끌어안고 기도했다. 그들의 치근댐은 집요하여 그칠 줄 몰랐다. 한밤중에 담을 넘어 침실을 급습하기까지 했다. 여옥은 신경이 쇠약해져서 나날이 여위어갔다.

"자매야, 빛나던 그 얼굴에 거미줄 같은 수심이 가득하구나."

예배당에서 만난 베키 대부인이 염려해주었다.

"향수병이 깊어졌나이다.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겠는지요?"

여옥은 차마 전 남편의 소생들이 성가시게 군다는 건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죽은 이후 고려 땅과 부모형제가 못내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가엾은 자매야, 고려 여인들 모임에 나가서 향수병을 달래보지 그러느냐.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아버지나라, 천국이니라."

베키 대부인은 여옥과 기를레 모녀를 고려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여옥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베키 대부인은 대뜸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살자고 제안했다. 의자매를 맺고 한 식구가 되자고 했다. 여옥은 곧바로 톨루이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성경을 읽고 찬송과 기도하며 사랑으로 충만한 나날이 흘렀다.

어느 날, 여옥이 잠결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무도 생생하여 깨어나자마자 베키 언니를 찾았다.

"언니, 그 분이 제게 강림하사 풀씨처럼 동방으로 날아가 복음(福音)을 전하라 이르셨답니다."

여옥은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하늘을 우러르며 읊조렸다. 베키는 영원의 세계를 더듬는 여옥의 눈빛을 보았다.

"가라! 돌아가 무지개 나라에 한 알의 밀알을 심어라!"

베키 대부인은 동방으로 가는 상단(商團)을 수배하여 여옥과 기를레를 딸려 보냈다. 황족의 예우를 갖춰 정중히 모시라는 명령과 함께 일곱 수레나 되는 보물들을 주었다.

여사제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거기까지 풀어냈을 때, 나는 맥주라는 특이한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까닭 없이 웃었는가 하면 비틀거리며 오줌을 내갈기도 했다. 여사제는 나를 부축해 산막 침상에 뉘였다. 꿀물을 먹여주고 잠을 자게 했지만 나는 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바리데기 공주를 아느냐?"

"무당들이 입방아찧어대는 그 여인! 불경에도 비슷한 인물이 있지요. 선재동자라고. 그런데 바리데기가 뭘 어쨌다고요?"

나는 술기운으로 더워진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카라코룸을 떠난 지 삼 년간 나는 영락없는 바리데기였다. 만주벌판에서 마적단을 만난 상단은 몰살당했고 나는 마적 두목과 살며 사내아이를 낳아줬다. 나는 내 소명을 말하며 간청했지만 마적 두목은 절대로 나를 놔주려들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을 버티니 그가 말했다. 꼭 가려거든 눈이나 귀, 코, 혀 가운데 하나를 잘라놓고 가라고. 나는 거침없이 혀를 자르라고 대주었다."

여사제가 입을 열어보였다. 혀가 뭉뚝 잘려있었다.

"복음을 전하려면 혀가 필요한데 어찌?"

"복음은 혀로 전하는 게 아니니까. 아낌없이 주는 사랑은 온몸으로 실천하지 거니까. 그렇지 못하면서 세치 혀만 놀리는 신앙인은 차라리 말을 않느니만 못하다."

취중이었지만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다 주면 또 얻는 기회가 온다. 나는 혀를 잘라주고도 이렇게 너와 자유롭게 대화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여사제 앞에 오체투지로 절했다.

"전쟁 통에 이 복된 땅은 어떻게 구하여 정착했나이까?"

"바람이 내게 속삭였고 물길 따라 왔느니라."

"김승 촌장이나 선사 소군, 탁연 같은 이들과는 어떻게 만났고요?"

"가온이 있으면 저절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고롭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나를 거쳐 가온에게 가면 모두가 지복(至福)을 누리게 되었다. 그게 천복(天福)이기도 하지."

"가온이 기를레지요?"

김종록 소설가
일러스트=이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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