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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잠수정 타고 마리아나 해구 내려간 제임스 캐머런 감독 런던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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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타이타닉 3D’ 프로모션 행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잭 도슨 역을 했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최근 영화를 본 뒤 “내가 저렇게 젊었었냐”며 배를 잡고 웃었다고 말했다. [도쿄 AP= 연합뉴스]

“영화를 위해 심해 탐사를 하냐고? 그 반대다. 탐사를 위해 영화를 만든다.”

 ‘타이타닉’(1997) ‘아바타’(2009) 등의 흥행 대작을 만든 제임스 캐머런(58) 감독은 지금의 자신을 만든 8할 이상이 호기심이라고 했다. 그 호기심 때문에 그는 지난달 26일(현지시간) 1인승 잠수정을 타고 가장 깊은 해저인 서태평양 마리아나 해구의 챌린저 해연(1만990m)을 탐사했다. ▶<3월 31일자 20면>

 캐머런 감독은 해저 탐사를 끝내자마자 지난달 27, 28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영화 ‘타이타닉 3D’ 프리미어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올해 타이타닉호 침몰 100주년을 맞아 ‘타이타닉’을 3D로 변환해 스크린으로 다시 불러들였다.(5일 개봉) 그는 해저탐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고무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행사일정에 간신히 맞춘 것 같다.

 “사실 심해 탐사가 한 달 전 끝났어야 했다. 헬기 충돌로 탐사팀 멤버 두 명이 숨지면서 일정이 지연됐다. 영화홍보가 끝나면 다시 탐사에 들어간다.”

 -탐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잠수정에 장착된 3D 카메라로 심해를 촬영했다. 3D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챌린저 해연에 가니 마치 달에 착륙한 기분이었다.”

 -심해에서 무엇을 봤나.

 “머리가 여럿 달린 생명체를 보진 못했다.(웃음) 황무지 같은 곳이지만 새로운 생명체가 있을 거라 믿는다. 2주전 8200m 해저에서 새로운 종의 해파리를 봤는데 경이로웠다.”

 -언제부터 심해에 매료됐나.

 “16세 때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부터다. 난파선에 관심 갖다 보니 타이타닉호를 파고들게 됐다. 타이타닉호는 정복하고 싶은 에베레스트산 같은 존재였다.”

 -탐사 때문에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는.

 “탐사는 엄청난 돈이 든다. 할리우드 영화로 번 돈을 비용으로 쓴다. 영화는 탐사를 뒷받침해주는 수단이다.”

 -타이타닉호 탐사와 마리아나 해구 탐사를 비교한다면.

 “외계에 표류한 타이타닉호에는 이상한 물고기와 생물들이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반면 마리아나 해구는 인간의 흔적이 전혀 없는 미지의 세계다. 지구 탄생때 생명체를 만날 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든다.”

 -타이타닉호 침몰의 교훈은 뭘까.

 “타이타닉호는 속도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안전을 등한시했다. 과학기술·정부·금융시스템도 눈 앞의 이익만을 쫓다가 한 순간에 붕괴할 수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도 마찬가지다. 경고등은 예전부터 켜져 있다. 우주에서 안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화 ‘타이타닉’을 다시 스크린에 불러들인 이유는.

 “재난 속에 피어난 용기와 희생, 순수한 사랑은 세대를 초월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침몰 100주년을 기념해 3D기술로 더욱 깊어진 사랑과 상실의 감정을 담은 ‘타이타닉’을 극장에 올리고 싶었다.”

 -‘타이타닉’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매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타이타닉호 충돌 시각)에는 희생자들을 위해 애도의 잔을 든다. 잠수정을 탄 채 타이타닉호와 마주한 순간부터 내 영혼의 일부는 그 배에 머물고 있다.”

 -‘타이타닉’의 팬이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런 영화를 무척 만들고 싶어했다고 한다.

 “정말인가? 내게 전화를 했으면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웃음) 그가 영화광이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타이타닉호=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스햄튼항에서 뉴욕으로 첫 출항에 나섰던 영국의 초호화 여객선. ‘신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는 문구로 안전성을 홍보했지만 4월 14일 밤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거대한 빙산과 충돌해 2시간 40분 만에 침몰했다. 승객과 승무원 2200여명 중 1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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