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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볼셰비키” … 총살된 조선 여인, 김알렉산드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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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롭스크시 칼리니나가에 있는 한인사회당 창당 장소. 1918년 5월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결성된 곳이다. [사진 국외항일운동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
하바롭스크시 무라비예프가에서 김알렉산드라가 활동하던 건물.
독립신문에 연재된 ‘김알렉산드라(오른쪽) 소전’. 한국에선 잊혀졌지만 하바롭스크에서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식민지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해방 운동의 한 주류였다. 내부에 많은 파쟁이 있었고 민족주의자들과 많은 다툼도 겪었지만 이 시기에는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세력이었다.
6·25 남침으로 이런 인식이 근본적 변화를 겪게 되지만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은 이제 재조명할 때가 되었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① 사회주의 정당 창립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3월(러시아력 2월) 만주 북단 아무르강(흑룡강) 강변의 도시 하바롭스크에 일단의 한인들이 모여들었다. 러시아 극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노췌코프가 주최하는 조선혁명가대회가 열린 것이다. 이동녕·양기탁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 등 민족주의자들, 이동휘·류동열 등 민족적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김알렉산드라·오하묵·유스테판·오와실리 같은 볼셰비키들이 참석했다.

대회에서는 재러시아 한인들이 볼셰비즘을 받아들일지를 두고 두 노선이 대립했다. 이동녕·양기탁·안공근 등은 러시아의 지원은 필요하지만 볼셰비즘까지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반면 김알렉산드라·오하묵 같은 볼셰비키는 물론 이동휘·류동열 같은 민족적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해방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볼셰비즘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은 이탈했지만 볼셰비즘에 찬동하는 한인들이 1918년 4월 28일(러시아력) 다시 모여 한인사회당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한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다.

한인사회당은 이동휘·김립 등 민족적 사회주의자들과 러시아 혁명 이전에 이주한 한인들의 자녀들인 김알렉산드라, 오하묵, 박애(마뜨베이 박) 같은 귀화 2세들의 연합전선체였다. 한인사회당은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이동휘를 선임하고 군사부장 류동열, 선전부장 김립 등을 선임했는데 산하에 조직부·선전부·군사부 등 3개의 집행부서와 출판사 보문사(普文社)를 두고 한국 역사·지리서 등 교과서와 기관지 ‘자유종’을 발간했다.

한인사회당 창립 두 달 후쯤인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이 반(反)볼셰비키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극동지역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체코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군으로 동부전선에 출전했다가 러시아에 포로가 된 체코군단을 뜻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이 체코군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1918년 2월 공동 출병하면서 시베리아 정세가 급변했는데, 속셈은 러시아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차르 체제를 지지하는 백위군(白衛軍)은 천군만마를 얻은 반면 볼셰비키 세력은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내전은 다시 백위군의 우세로 돌아섰고 한인사회당 인사들은 하바롭스크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동휘 등은 러시아 내전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류동열과 김알렉산드라 등 100여 명의 한인은 조선인 적위군(赤衛軍)을 조직해 카르미모프가 지휘하는 백위군과 맞서 싸웠다. 전황은 볼셰비키에 불리해져서 극동인민위원회와 한인사회당도 하바롭스크를 떠나 아무르주(흑룡주)로 이전해야 했다. 하바롭스크가 백위군에 함락된 이틀 후인 9월 10일 류동열·김립·김알렉산드라 등은 마지막 탈주선인 ‘바론 코르프(남작 코르프)’호를 타고 하바롭스크를 떠났지만 도중에 백위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백위군은 즉결심판으로 류동열·김립 등 10여 명의 한인들을 석방하고 김알렉산드라 등 18명에겐 사형을 선고했다. 마트베이 김(Matvei Timofeevich Kim)은 김알렉산드라의 전기에서 백위군 장교가 “조선인인 그대가 왜 러시아의 시민전쟁에 참가했는가?”라고 묻자 “나는 볼셰비키다…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는 경우에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답하고 총살당했다고 전한다.(반병률, 김알렉산
드라 페트로브나의 생애와 활동)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2년(1920) 4월 17일자, 20일자, 22일자에 ‘뒤바보’란 필명으로 ‘김알렉산드라 소전(小傳)’을 연재했는데 김알렉산드라의 부친은 함경북도 경흥에서 기사년(己巳年·1869년) 대흉년 때 러시아로 이주한 김두서(金斗瑞)였다. 1885년생인 김알렉산드라는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폴란드인 친구인 스탄케비치의 손에 양육되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다. 이후 러시아 혁명운동에 나서 1917년 극동지방 조선인 조직사업을 책임지게 되었고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김알렉산드라의 처형은 이동휘 등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1920년 1월 22일 바이칼호 서쪽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오하묵 등 한인들이 결성한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는 이후 이르쿠츠크파로 불리면서 상해파로 불린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과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는데 김알렉산드라가 살아 있었다면 이동휘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1919년 9월 김립과 사위 오영선을 대동하고 상해에 도착해 임정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그의 국무총리 취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동휘는 1917년 2월 혁명 직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결성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와 이 조직이 확대된 대한국민의회 주요 구성원이었는데,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등이 이동휘의 임정 참여를 강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동휘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임정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세력을 자파로 끌어들이려는 계산이었다. 김구는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국무총리 이동휘가 경무국장 김구에게 “우리(임정) 독립운동은 민주주의인즉 이대로 독립을 한 후에도 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되니 두 번 유혈은 민족의 대불행인즉 적은이(김구)도 나와 함께 공산혁명을 하자”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때 김구는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지휘를 받지 않고 공산혁명을 할 수 있느냐”면서 거부했지만 여운형 등은 이동휘가 상해에서 만든 ‘공산주의자 그룹’에 가담했다.

이동휘 등은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회’를 개최하고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이것이 세칭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다. 하바롭스크의 한인사회당이 모태인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민족주의 좌파 계열의 사회당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고려공산당 및 전로공산당의 개황(高麗共産黨及全露共産黨ノ梗槪(1923)에 따르면 이동휘는 ‘독립운동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해 유력한 정부의 원조를 얻기 위해 볼셰비키와 손을 잡았다’고 전하고 있다. 사실 이동휘의 이런 전략은 주효해 레닌으로부터 40만 루블이라는 거액을 지원받기도 했던 것이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결성되던 1921년 5월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도 이르쿠츠크에서 전로고려공산단체 중앙위원회를 열고 고려공산당을 결성했다. 이것이 시종 상해파와 경쟁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었다. 이처럼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은 두 파가 모두 해외에서 결성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만큼 사회주의 운동도 나라를 빼앗긴 민족모순의 규정성이 강했다는 뜻이다.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이 계급해방 투쟁보다 민족해방 투쟁 운동으로 인식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파는 모두 고려공산당이란 명칭을 사용했지만 민족주의와 연합전선을 둘러싼 노선에서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이르쿠츠크파는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상해파는 적극적이었다.

양파가 대립하자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이 조정에 나섰다. 그 결과 1922년 10월 19~28일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양파의 통합을 위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가 열렸다.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문서 보관소의 회의 기록에 따르면 이르쿠츠크파 60명, 상해파 72명 등이 참석했고 한국의 중립공산당도 2명이 참가했다. 하지만 10월 23일 제3차 회의에서 장건상이 “이르쿠츠크에서 온 대표자들이 대회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나도 이 그룹의 지지자이기 때문에 대회장을 떠나겠습니다”라면서 떠난 것처럼 통합대회는 난항을 겪었다. 이때 러시아 공산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보스트뜨이세프는 “나는 그들(이르쿠츠크파)이 퇴장한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코민테른 측은 두 파가 통합된 고려공산당이 출현해 코민테른에 가입하기를 바랐지만 쉽지 않았다. 10월 26일 열린 제10차 회의에서 보스뜨이세프가 ‘극동에서 백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블라디보스토크가 함락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자 박수와 만세 소리가 대회장을 뒤덮었다. 그럼에도 회의에 참석했던 정재달이 “이르쿠츠크파는 전부 치타로 철수하고 말았다”고 회고한 것처럼 끝내 통합에는 실패했다. 대회에서는 이른바 레닌 자금 40만 루블의 사용처 문제로 다시 큰 소동이 벌어졌는데 이 문제는 두고두고 이동휘를 괴롭혔다.

연합대회의 요약보고서는 이동휘에 대해 “좋게 말해도 그는 낭만적인 민족주의자적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코민테른도 이동휘가 볼셰비키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선지 코민테른은 이르쿠츠크파가 거부한 당을 한인 유일의 공산당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양파를 모두 해체하고 코민테른 극동부(동양비서부) 산하에 꼬르뷰로, 즉 고려국(高麗局)을 설치했다. 한인공산당 조직문제가 꼬르뷰로로 이관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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