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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 틔워 빚은 단술은 왕세자 음복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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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호 32면

보리 하면 우리는 보릿고개를 생각한다. 봄철 3 , 4월께가 보릿고개였다. 밀과 함께 보리는 새로 수확될 햅쌀과 이미 수확된 쌀 사이를 잇대어 먹는, 농가에서 가장 긴요하게 여기는 곡식이었다. 백로(白露· 처서와 추분 사이로 9월 8일께) 또는 추분(秋分·백로와 한로 사이로 9월 20일께) 때에 밭을 다듬은 뒤 10일 후에 심고 다음해 망종(芒種·6월 5일께)쯤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춘궁기 즉 보릿고개가 생겼다.

김상보의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본 제철 수라상 <17> 보리

9000년 전 이란·이라크에서 재배하던 보리는 민족 이동에 따라 7000년쯤 전에는 이집트에서 재배했다. 그 후 그리스·로마시대 유럽 각지로 전파돼 주식으로서 밀보다도 더 중요시됐다. 5000년 전께에는 티베트를 경유해 중국에 이르렀는데, 2000년 전을 전후해 한반도에서도 주 곡식 역할을 하고 있다.보리는 이삭이나 낟알 모두 밀보다 크다. 그래서 밀을 소맥(小麥), 보리를 대맥(大麥)이라 한다. 성질이 따뜻해 밥으로 해서 먹으면 소화를 돕는다. 보리가 가진 강한 효소력(酵素力) 때문이다. 이 효소력을 이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맥아(麥芽·엿기름)다.

일찍이 북유럽에서는 보리싹의 강한 효소작용을 이용해 맥아주(麥芽酒)인 맥주를 만들고, 맥주를 증류해 위스키를 양조했다. 북유럽의 보리싹을 이용한 양조 기술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도 전해졌다. 예를 들어 1670년을 전후해 나온 『음식지미방』의 술 제조법에 나타난, 밀가루를 첨가시켜 발효시키는 것 등은 맥아가루가 밀가루로 대체된 결과라는 것이다.

유럽에서 전해진 맥아주의 원형은 현재 우리들이 마시고 있는 단술 곧 식혜(食醯)에서도 나타난다. 보리를 물에 담가 불려 싹이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햇볕에 말린다. 다음에 가루로 만들어 물을 타 고운 체로 거른 후 여기에 시루에서 쪄낸 밥을 넣고 보온해 발효시킨 음료다.
조선왕조에서는 단술을 예주(醴酒)라 했다. 장차 부인을 맞아 새로운 가정을 꾸려 이끌어 나갈 왕세자에게 임금인 아버지가 조상신 앞에서 술 한잔을 올리고 이를 왕세자에게 음복하게 하여 훈계했다. 신랑 될 왕세자가 성인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다지게 하는 의례인 임헌초계의(臨軒醮戒儀)를 행할 때, 그리고 신랑인 왕세자가 신부집으로 신부를 맞이하러 오기에 앞서 신부의 아버지가 딸에게 시집가서 행해야 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해 조상신 앞에서 훈계하는 의례인 예녀우방중(醴女于房中) 때 바로 이 예주를 사용했다.

보리싹 맥아는 조선시대에 약성(藥性)으로 널리 알려졌다. 따뜻하고 식적(食積·위에 쌓여 있는 음식물)을 소화한다는 약성 때문에 맥아로 만든 식혜 단술은 양반가는 물론 서민에게도 널리 퍼져 음료로서 애용됐다. 1750년을 전후해 쓰인 『수문사설』에는 소도식혜를 이렇게 소개했다. ‘항아리 속 시루에서 쪄낸 밥을 붓고는 그 속에 엿기름물을 밥이 잠길 정도로 붓는다. 엿기름물은 뜨거운 물에 오랫동안 담가서 고운 체로 내린다. 굴뚝에 밤새 올려놓았다가 닭이 울 때 찬 곳에 옮겨둔 다음 식성에 따라 대추·밤·잣·배·유자·꿀로 조화해 각각의 과일향을 우러나게 만든다’.

한편 맥아는 흑당(黑糖)·백당(白糖)·이(飴)라고 불렀던 각종 엿의 재료가 되었다. 맥아를 이용해 전분을 발효시켜 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1909년께의 엿장수를 보면 커다란 갓을 쓰고 엿 상자를 목에 걸쳐 앞으로 드리우고는 가위로 찰칵찰칵 하면서 “엿, 엿, 엿 사려” 외쳐대며, 2관(貫·한 상자분)의 흰 엿과 검은 엿(대추엿)을 하루 종일 걸어다니면서 전부 팔았다고 한다. 그러면 1원(100전)의 순이익이 남았다 하니, 당시 한 끼 식사가 5전이었으니까 꽤나 좋은 돈벌이였던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엿 제조업자가 엿을 만들 때에는 월경하는 여인이나 피 묻은 옷을 입은 사람의 접근을 금지했다. 부정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엿을 굳히기 전 단계인 액체 상태의 엿을 조청이라고 했다. 조청은 조선왕조에서 만들었던 각종 유밀과(油蜜果)류의 본 재료에 들어가거나 완성된 과자에 집청하는 주요한 재료다. 과자류의 소화를 돕는 동시에 과자의 씹는 질감과 달콤한 맛을 향상시켜 준다.

조선왕조는 예주·조청·엿 등의 재료가 되는 대맥(大麥)은 전라도의 고부·곡성·김제·남원·담양·익산·장성·정읍·구례와 충청도의 옥천에, 보리밥 짓는 데 쓰였던 대맥미(大麥米)는 역시 전라도의 고창·광주·무주·순창·임실·전주·태인·화순 등에 진공(進貢) 형태로 백성들에게 부과시켰다(『여지도서(輿地圖書)』, 1757).

전라도에서 집중적으로 진공한 바와 같이 전라도만이 보리 생산에 참여했다. 요즘도 보리밥에 대한 정서는 북쪽보다 남쪽 지방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 보리밥에는 보리피리와 더불어 고향에 대한 진한 향수가 남아 있다. 전라도 해남에 살았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보리밥에 풋나물을 넣고 비벼 먹는 정취를 시조로 남겼다.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초 먹은 후에/ 바위끝 물가에 슬카지 노니노라/ 그 남은 여남은 일이야 부를 줄이 있으랴.”


맥아 식혜 단술
항아리 속 시루에서 쪄낸 밥을 붓고 그 속에 엿기름물을 밥이 잠길 정도로 붓는다.엿기름물은 뜨거운 물에 오랫동안 담가서 고운 체로 내린다. 굴뚝에 밤새워 올려놓았다가 닭이 울 때 찬 곳에 옮겨둔 다음 식성에 따라 대추·밤·잣·배·유자·꿀로 조화해 각각의 과일향을 우러나게 만든다.



김상보. 한양대 식품영양학 박사.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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