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폐지됐던 워싱턴 노무관 자리 되살려 최종석 보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4호 03면

최종석 전 청와대 행정관이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에서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해 조사를 받은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시스]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파문은 크게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 질문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인데, 언론 보도를 통해 일부 드러났다. 현재까지 거의 드러나지 않은 건 두 번째 질문, 즉 ‘누가 은폐를 지시했느냐’다. 2010년 민간인 사찰 사건이 공론화된 뒤 관련자 일부는 형사 처벌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임태희 전 청와대 대통령실장이 처벌을 받은 사람들에게 금일봉을 전달한 사실도 밝혀졌다. 임 실장 측은 “옛날 부하들에 대한 위로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은폐 의혹은 많지만 구체적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앙SUNDAY는 취재 과정에서 권력층이 은폐에 개입했다는 강력한 정황 증거를 발견했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민간인 사찰 은폐에 권력층 개입 흔적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봄, 정부는 에너지 자원외교에 올인했다. 대한민국이 먹고살기 위해선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제3세계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자원대국인 인도네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고용노동부 소속 노무관을 파견키로 했다. 청와대 차원의 결정이었다. 문제는 늘어난 자리만큼 어디선가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와대와 외교부가 검토해 미국·독일·사우디아라비아의 노무관을 없애기로 했다. 노동부는 발칵 뒤집혔다. 당시 정종수 노동부 차관(현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나 “워싱턴 노무관은 없애면 절대로 안 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노동 관련 챕터가 있다. 앞으로 노사 문제와 관련해 한·미 갈등이 생기면 외교부가 조정할 수도 없다. 내가 그렇게 계속 읍소하는데도 안 받아준다”며 하소연했다. 하지만 원안대로 워싱턴 한국대사관 노무관은 자리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대체 워싱턴 노무관 자리가 민간인 사찰 은폐 의혹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그 열쇠는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최종석 전 행정관이 쥐고 있다. 최씨가 민간인 사찰 은폐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던 와중에 갑자기 없어졌던 워싱턴 노무관 자리가 부활됐고 거기에 최씨가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행시 출신으로 노동부에서 실력을 인정받던 최씨는 2008년 3월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로 발령 받았다. 고용노사비서관실에 배치됐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이영호 비서관이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만들어 지휘하기 시작하면서 최씨도 덩달아 그 일을 맡게 됐다. 각 팀들로부터 보고서를 받고, 이 비서관의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일 등을 했다. 하지만 2010년 사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최 행정관은 이른바 ‘뒤처리’를 해야 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에게 대포폰을 제공하고, 컴퓨터 기록을 삭제토록 하는 등 증거인멸을 지시한 것이다.

2011년 1월 해가 바뀌면서 언론은 다시 대포폰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최 행정관은 이때 소리소문 없이 청와대를 떠났다. 과천에 있는 노동부로 복귀하는 대신 산하기관인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 발령이 났다. 노동부의 가장 엘리트 직원이었고, 청와대에 파견돼 핵심 역할을 했던 최씨가 갑자기 한직으로 간 것이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노동부 고위 간부 Z씨는 “당시 최씨를 발령하면서 인사 보도자료도 내지 않아 다들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2011년 봄부터 최 행정관이 지급한 대포폰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야당은 2월에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6월에는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이 문제를 따졌다. 그해 7월 권재진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에 임명됐는데 인사청문회 때 대포폰 문제가 다시 불거질 것이라는 우려가 여권에 많이 나돌았다.
이런 가운데 2011년 8월 갑자기 워싱턴 한국대사관 노무관 자리가 부활했다. 필요 없다고 없애버린 지 불과 3년 만이다. 최씨가 그곳에 발령을 받았다. 노동부 간부 Z씨는 “최씨에게 우즈베키스탄 노무관으로 가라고 했는데 최씨가 버텼고, 어쩔 수 없이 워싱턴 노무관을 부활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며 “다른 부처에서 불만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미 폐지됐던 워싱턴 노무관 자리가 부활한 이유에 대해 주미 한국대사관은 “한·미 FTA와 관련해 양국의 노동 문제에 대해 협의해야 할 게 많아서 그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008년에는 정종수 노동부 차관이 똑같은 이유를 제시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뒤늦게 정 차관의 논리를 차용해 변명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부 행정부처의 또 다른 고위 공무원 R씨는 “모든 부처가 주미 한국대사관에 자기 직원을 내보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없앴던 자리를 순식간에 만들어 내는 건 다른 부처 장관들의 반발을 무마할 정도의 권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의 지시에 의해 워싱턴 노무관 자리는 부활했을까. 그리고 누가 최씨를 거기에 보냈을까. 이 대목이야말로 은폐 의혹의 몸통을 밝히는 핵심이다. 최씨는 지난달 28일 워싱턴에서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30일 증거인멸 등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신청된 상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