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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 대통령과 수시로 독대 최종석 미국 발령에 배후 실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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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호 01면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해 자신이 총리실 자료 삭제를 지시한 ‘몸통’이라고 주장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31일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그는 당초 전날 출석을 통보 받았으나 소환에 불응했다. 검찰은 31일 출두할 것을 재통보했다. [연합뉴스]

2009년 10월 6일, 청와대 위민2관(비서동 건물) 2층 경제금융비서관실에선 한바탕 활극이 벌어졌다. 이영호 고용노사비서관이 찾아와 “C행정관, 이XX 누구냐? 나와라” 하면서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할 게 있는데 C행정관이 자신과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 비서관은 1층의 근무자들이 놀라 확인에 나설 정도로 고래고래 고함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참다 못한 윤진식 정책실장과 임종룡 경제금융비서관이 말렸다. 이 비서관은 “너무 한다. 이제 그만하라”는 임 비서관에게 “뭐가 너무해, 당신도 조심해”라며 행패를 계속했다. 이 비서관은 다음 날인 7일에도 경제금융비서관실을 찾아와 “이XX들 똑바로 해” 하고 협박한 뒤 돌아갔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민간인 사찰 관련 핵심인물 단독 취재

이 비서관의 행패 사실은 이틀 뒤인 9일 조선일보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정도 물의를 빚으면 해당 비서관은 청와대를 떠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한참 뒤 “서면경고를 했다”면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정부 관계자 A씨는 “그렇지 않아도 이 비서관이 실세라고 다들 벌벌 떨었는데 그런 행패를 부리고도 멀쩡한 걸 보면서 정말 실세가 맞다는 말들이 나돌았다”고 회상했다.

2009년 청와대에서 활극을 벌인 이영호 비서관이 바로 “내가 민간인 사찰 사건의 몸통”이라고 기자회견을 한 당사자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얼마나 가까웠고, 또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일까.

한국노총에서 이씨와 가깝게 지냈던 B씨는 “이영호는 포항 K 종합고등학교와 대구 계명대를 졸업했고 학사장교 특례로 기업은행에 들어갔다가 평화은행으로 이직했다. 거기서 2대 노조위원장을 맡았는데 재선에 실패했다. 1998년 외환위기 때 한국노총이 명동에서 벌인 시위에서 두각을 나타내 금융노련 조직부국장으로 스카우트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금융노련에서 일하면서 노동계의 표를 얻으려던 MB쪽 사람들과 선이 닿았다고 한다. 고향이 포항이라는 사실도 고려가 됐을 것이다.

다시 B씨의 말이다. “이영호는 MB가 서울시장일 때부터 MB 측근인 박영준과 자주 만났다. 노동계에선 이영호가 몽골에 인력을 송출하는 회사를 차려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당시 외제차를 타고 다녀 깜짝 놀랐다.”

이씨는 2007년 대선 때 박영준이 주도해 꾸린 MB의 대선 조직 ‘선진연대’에 들어가 노동계 인사들을 MB캠프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 공로로 2008년 초 ‘대통령직 인수위’에 들어갔고 거기서 노동계에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배분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B씨는 “이영호가 인수위 때 공기업 사장들을 불러 하도 야단을 치는 바람에 내가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 적도 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는 다들 ‘왕(王)비서’라고 부를 정도로 실세가 됐더라”고 덧붙였다.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씨는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됐다. 청와대 관계자 C씨는 “출범 초기에는 박영준 기획조정비서관도 근무했기 때문에 박 비서관이 실세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08년 6월 정두언과 박영준 갈등이 불거져 박 비서관이 물러난 뒤에는 이영호 비서관이 사실상 실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아무리 실세라고 해도 어떻게 고용노사비서관이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사실상 지휘하는 책임을 맡게 됐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C씨의 증언이다. “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처럼 공무원 기강을 감찰하는 기관은 모든 정권에 다 있었다. DJ(김대중 대통령) 때는 사직동팀이 있었고, 그게 해체된 뒤 노무현 정부 때는 총리실 ‘조사심의관실’이 그 기능을 수행했다. 그런데 MB가 서울시장 때 조사심의관실에서 추석 명절 뇌물 수수 여부를 조사한다고 MB의 승용차 트렁크를 조사한 적이 있다. 1만~2만원쯤 하는 치솔·비누세트 하나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때 MB가 엄청 불쾌해 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아예 조사심의관실을 없애 버렸다.”

하지만 공직자 기강을 감찰하는 기관이 사라져 버린 후유증은 곧바로 나타났다. 2008년 봄 광우병 시위가 터졌을 때 청와대에는 일부 공무원들이 업무가 끝난 뒤 광화문에 나가 시위에 동참하는 사례가 있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왔다. 하지만 공무원 감찰기구를 없애버린 마당이어서 이를 견제하거나 감찰할 능력이 없었다.

사정기관 관계자 D씨의 말이다. “당시 이종찬 민정수석팀이 광우병 사태에 속수무책이었던 데 대해 MB는 크게 실망했다. 석 달 만에 이 수석을 경질하고 6월에 정동기 수석을 임명했지만 정 수석에 대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사심의관실의 기능을 대신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걸 누가 건의했는지는 모른다.” 중앙SUNDAY는 공직 기강을 점검하는 조직을 부활하자고 대통령에게 건의한 사람이 누군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조직을 만든 사람은 취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영호 고용노사비서관이었다.

물의를 빚고 있는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근무했던 Q씨의 증언이다. “2007년 6~7월께로 기억하는데 청와대 이영호 비서관이 불러서 만났다. 함께 일해 보자더니 고향이 어딘지부터 먼저 묻더라. 나중에 보니까 이 비서관이 데려온 사람들 대다수가 TK(대구·경북)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5개 팀으로 시작했다. 그해 여름 청와대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5명의 팀장과 이영호 비서관이 첫 미팅을 했다.”

이들 5명의 팀장은 처음엔 정부 중앙청사 내 작은 사무실에서 준비 작업을 했다. 그해 가을 7개 팀으로 확대되면서 정부 중앙청사 창성동 사무실로 옮겨갔다. 법적으로 따지면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 조직은 출범 때부터 이영호 비서관이 주도했고 직원들도 사실상 이씨가 충원했다. 따라서 업무보고도 민정비서관실이 아니라 고용노사비서관실 책임자인 이 비서관과 부하였던 최종석 행정관에게 했다. 정상적이라면 민정비서관실에서 항의를 했어야 하지만 이영호 비서관이 실세였기 때문에 덮어둔 것으로 보인다.

다시 Q씨의 증언이다. “처음에 만들어졌던 5개 팀 중에서 1팀장이 김충곤씨인데 그는 2010년 사찰 사실이 불거졌을 때 사법 처리를 받았다. 요즘 언론에 불거져 나온 2619건의 사찰 자료가 바로 1팀의 것이다. 김충곤씨는 경찰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때 경정에서 총경 승진을 못해 옷을 벗었다. 그래서 그쪽에 대한 감정이 매우 나빴다. 고향이 포항이어서 이영호 비서관에게 발탁된 걸로 안다. 김충곤 팀은 국세청에서 파견된 1명을 빼곤 다 경찰 출신들로 채워졌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온갖 잡다한 정보를 다 들고 왔다. 공직자이거나 정부 투자·재투자 기관 사람들 자료만 남기고 나머지는 폐기해야 하는데 안 그랬던 걸로 안다. 게다가 그걸 자료로 만들어 보관한 건데 사실 사정기관에 종사하는 입장에선 어이가 없다. 이건 완전히 아마추어들이 하는 짓이다.”
Q씨에게 공직윤리지원관실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공무원 감찰은 할 수 있다고 쳐도 보고를 민정비서관실에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종찬 수석이 물러가고 정동기 수석도 이쪽 일(공무원 감찰)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비(이영호 비서관)’가 모든 걸 맡아서 했다. 당시 대통령실장이 정정길씨였는데 그분도 이쪽 일은 거의 몰랐다. 2009년 8월 권재진씨가 민정수석으로 왔는데 그때부터는 민정 쪽에서 이영호 비서관이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장악한 데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2010년 사찰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는 보고 채널이 민정비서관실로 단일화됐다.”

-이영호 비서관이 민정비서관실과 대통령실장까지 무시했다면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가능성은 없나.
“비서관들이 대통령 만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는 이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간간이 보고했던 걸로 알고 있다.”

-민간인 사찰도 했는데 대통령이 그런 부분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도 민간인을 사찰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KB한마음 대표 김종익씨의 경우 처음에는 KB라는 용어 때문에 정부 재투자기관인 줄 알았다. 그냥 민간인이었다면 상관 안 했을 것이다.”

-한겨레 21 편집장도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았나.
“그걸 한 게 1팀인데 거의 경찰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동향 정보를 많이 가져왔다. 증권사 지라시에 들어 있는 내용도 많다. 읽어보고 민간인에 대한 것이면 걸러내야 하는데 그걸 다 리스트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심하다.”

-BH(청와대) 하명 사건이라고 적힌 게 있다. 뭔가.
“(웃으며) 민정비서관실이나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확인할 게 있으면 우리에게 자료를 내려 보낸다. 그 경우 BH에서 온 거라고 적어둔다. 그건 이명박 정부 때만이 아니라 모든 정부에서 다 그렇게 해왔다. 그것만 가지고 청와대가 개입했다고 떠드는 건 좀 우습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과 정태근 의원도 사찰했다는데.
“남 의원은 부인이 보석 사업을 하다 문제가 돼서 고소를 당했다. 강남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남 의원이 전화를 했다고 하더라. 그걸 확인해 본 것으로 안다. 정태근 의원에 대한 건 잘 모른다. 하지만 이 두 의원이 사찰 당했다고 마구 떠드는 바람에 실제로는 아무것도 못한 걸로 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세상을 흔들어 놓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다고 보는가.
“공직감찰은 역대 정권이 다 했던 것이고 또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제도적으로 했어야 한다. 이영호 비서관은 법적 권한이 없는 사람인데 민정비서관실을 제쳐놓고 자기가 총리실 산하조직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그게 결국 사조직화해 버린 것 아닌가.”

-이 비서관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결국 대통령의 신임 때문 아닌가.
“그렇다. 대통령의 신임이 있었기 때문이고, 동시에 이 비서관 본인의 캐릭터도 크게 한몫했다. 옛날에 청와대 비서동에서 사고 칠 때는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번에 기자회견 하면서 울고 불고 난리 치는 것 국민들이 다 보지 않았나. 호적상 65년생인데 자기가 원래는 62년생이라고 주장하고, 고등학교 중퇴한 뒤 뱃사람으로 일하다 검정고시 봤다고 하더라. 자기는 인생에서 겪을 것 다 겪었다면서 통 크게 나갔다. 2009년 청와대에서 사고 쳤을 때 잘라 버렸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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