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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투자자에게 중국 기업은 가까이하기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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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홍콩 기업 ‘차이나그린페이퍼패키징’은 최근 한국 주식시장에 상장하려던 계획을 접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달 중순 공모 청약을 할 예정이었다. 이 회사는 몇 년 동안 한국증시 상장을 차근차근 준비해 왔다. 지난해 9월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했고 12월 통과했다. 공모를 위한 증권신고서도 제출했다. 수요예측을 거쳐 공모청약만 하면 절차가 모두 끝난다. 하지만 이 회사는 막판에 공모 일정을 사실상 철회했다. 공시를 통해 밝힌 연기의 표면적 이유는 ‘투자자에게 회사의 최신 재무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2011년 감사보고서 발행 이후로 공모일정을 미룬다’는 것이었다.

 속사정은 달랐다. 한국 상장을 포기하고, 대만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의 깐깐한 심사가 거듭되자 ‘(당국이) 승인을 해줄 마음이 없는 것 아니냐’고 여기게 됐다고 한다.

 상장을 주관한 신한금융투자 관계자는 “대만과 싱가포르 쪽에서 ‘고섬으로 인해 중국 기업은 낮게 평가받는데 굳이 한국 증시에 상장할 필요가 있느냐’며 지속적으로 설득하자 마음을 바꾼 것 같다”고 말했다. 차이나그린페이퍼는 2006년 홍콩에 설립된 지주회사로, 중국 내에 제지사업(연성제지, 홍이제지)과 포장박스 사업(홍징패키징, 홍태패키징)을 하는 자회사 네 곳이 있다. 지난해 원화 기준으로 매출 1327억원, 당기순이익 197억원을 올렸다. ‘고섬 사태’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한국 주식시장의 문을 두드렸던 중국 기업이다. 성장성이 높고 사업 내용도 뚜렷해 증권업계에서는 ‘나쁘지 않은 물건’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해외 기업 한국 증시 상장 줄줄이 철회

 ‘고섬 사태’ 이후 1년이 흘렀다. 중국 기업 고섬이 작년 1월 한국 증시에 상장한 지 두 달 만에 회계 문제로 거래가 정지됐고 수많은 투자자가 피해를 입었다. 세월이 지났지만 ‘트라우마’는 현재진행형이다. 차이나그린페이퍼뿐만이 아니다. 한국 주식시장의 문을 두드렸던 다른 해외 기업도 줄줄이 발길을 돌렸다. 금융당국이 상장 기준을 대폭 강화해 외국 기업에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 강화된 심사를 통과해도 투자자의 심리가 워낙 나빴다. 수요예측 결과가 회사 측의 기대에 못 미쳤다.

 동양증권 원상필 연구원은 “고섬 사태 이후 아직까지도 해외기업 상장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고 말했다. 지난해와 올해 중국대제유한공사, 썬마트홀딩스, 컴바인윌홀딩스 등 중국 기업이 상장예비심사 접수를 자진 철회하거나 공모 단계에서 돌연 포기했다.

 이미 한국 증시에 들어온 중국 기업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른바 ‘차이나 디스카운트’다. 한국에 상장한 중국 기업 주가는 급락했다. 코스닥에 등록한 ‘차이나킹’의 주가는 고섬 사태 직전 주당 4000원대였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장중 1760원까지 떨어졌다. 13일 종가도 2915원으로 공모가를 한참 밑돈다. 다른 중국 기업 주가도 비슷하다.

 이 때문에 지난 7일 한국거래소에서는 한국에 상장된 중국 기업을 모아 합동 기업설명회(IR)를 열기도 했다. 설명회를 통해 투자자의 마음을 열어보겠다는 시도였다. 2009년부터 매년 여는 설명회지만 이번에는 규모가 훨씬 컸다. 3개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을 직접 찾아 전문가를 대상으로 일대일 미팅도 하고, 언론사를 대상으로 인터뷰도 했다. IR에서 이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고섬과 다르다”고 호소했다. 한국거래소 진수형 부이사장은 “일부 기업의 문제로 중국 기업의 정보가 투자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결국 투자자도 손해”라고 말했다.

 그나마 2분기쯤 일본 기업을 중심으로 해외기업의 한국증시 상장이 재개될 움직임이 보인다. 최근 일본 모기지 업체인 SBI모기지가 상장예비심사를 통과했다. 또 일본 온라인결제 기업인 액시즈홀딩스가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했다. 신한금융투자 관계자는 “개인투자자의 부정적인 인식은 여전하지만 중국 기업의 성장성이 워낙 좋아 기관투자가는 이제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고 말했다.

 #투자자 1년 속앓이, 곪는 상처

 고섬 투자자의 속앓이도 여전하다. 관련 소송도 아직 진행되고 있다. 중국 고섬 투자자 553명은 한국거래소, 대우증권, 한화증권, 한영회계법인 등을 상대로 지난해 10월 19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달 말 1차 심리가 잡히는 등 본격 재판조차 진행되지 않았다. 결과가 나오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투자자는 여전히 분통을 터뜨린다. 길고 지루한 소송 결과를 기다리는 데도 지쳤다. 그사이 감사원이 감사를 진행해 지난달 한국거래소의 책임을 묻는 감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거래소가 지난해 3월 중국 고섬이 싱가포르 증시에서 매매거래가 중단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채 국내에서 KDR(주식예탁증서)이 약 한 시간 동안 거래되도록 방치해 개인투자자들이 금전적 피해를 볼 우려가 커졌다는 내용이었다. 투자자는 심사를 한 거래소나 상장을 주관했던 대우증권이 1년이 되도록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는 데 마음이 상했다. 한 투자자는 주주모임 카페에 글을 올려 “1년을 기다렸는데 얼마를 더 못 기다리겠느냐”면서도 “어째서 아직까지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정작 당사자인 고섬은 여전히 거래정지 상태다. 거래소는 지난해 3월 고섬 거래를 정지시킨 뒤 약 1년의 시간을 줬다. 이달 15일까지 ‘개선 기간’을 부여해 상장폐지 여부 결정을 연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투자자는 ‘상장이 폐지되면 소송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커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개선 기간이 끝나는 15일 이후, 고섬 측이 개선계획을 어떻게 이행했는지를 제출하고 거래소에 심의 요청을 하게 된다. 거래소는 상장공시위원회를 열어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가 남았다. 거래소 황호진 팀장은 “다음달 중순께 상장폐지 여부가 최종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거래소 측은 결과에 대해 언급을 피한다. 하지만 증권업계에서는 상장 폐지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고섬 사태 일지

2011년 1월 25일 코스피 상장(KDR 2차 상장)
3월 21일 싱가포르 증시 매매거래 중단
3월 22일 한국증시 매매거래 중단
3월 24일 재무제표와 실제 예금잔액 불일치 발생 확인
4월 14일 불성실 공시법인 지정
4월 15일 감사보고서 제출기한 6월로 연기
4월 21일 경영진 퇴진, 특별감사인(pwc) 선임
10월 14일 싱가포르 언스트앤영 ‘감사의견거절’ 제시
11월 2일 상장폐지 이의신청 제출
11월 22일 거래소, 올 3월 15일까지 개선기간 부여

상장 철회했거나 지연되고 있는 외국기업

● 중국 루통(도로용 페인트원료)
중국 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지연
중국건재설비(벽돌)
예비심사 청구 후 자진철회
차이나그린페이퍼패키징(제지)
증권신고서 제출 후 자진철회
컴바인윌홀딩스(완구)
수요예측 결과 저조해 자진철회
이비에이치인더스트리(섬유)
예심 청구 후 자진철회
썬마트홀딩스(플라스틱)
수요예측 결과 저조해 자진철회

● 미국 유나이티드머천트서비스(카드 결제대행)예심청구 후 자진철회

● 싱가포르 UMS홀딩스(반도체 장비)
예심청구 후 자진철회

● 일본 파워테크놀로지(검색엔진)
수요예측 결과 저조해 자진철회 자료 : 동양증권·증권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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