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j Novel] 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3.칼을 베어버린 꽃잎 (15)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0면

일러스트=이용규 buc0244@naver.com

농민들이 멘 상여는 목책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뾰족하게 날을 세운 어른 키 높이의 목책이었다. 상두꾼들이 제자리에 서서 구호를 외치자 선봉에 선 농민군들이 앞으로 몰려나와 목책을 제거하려 들었다.

 “목책에 손대면 쏜다!”

 승군 장수가 뒤로 물러서며 경고했다. 그래도 목책을 치우려 들자 승군 장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승군들이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선봉대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중놈들이 정말 사람을 겨누네.”

 맨 뒤에 있던 화적패들이 그렇게 외쳤다. 농민군들이 술렁거렸다. “우리는 더 이상의 살생을 원치 않는다. 목책을 넘어오면 전 궁수가 무차별적으로 사격할 수밖에 없다.”

 승군 장수는 단호했다. 하지만 천 명도 넘는 농민군을 몰살할 수는 없었다. 농민군들 후미에는 아녀자들까지 있었다. 선봉이 죽어 넘어지면 눈이 뒤집힌 아녀자들이 밀려들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들까지 희생시키는 건 너무 부담이 컸다. 승군 장수는 내심 목책을 버팀목으로 시간을 끌다가 싸움이 흐지부지되기를 바랐다.

 농기구나 죽창 따위로 변변찮게 무장한 농민군들은 더 진격하지 못하고 구호를 외치며 버티기로 나왔다. 한낮이 되면서 그 구호가 관세음보살로 바뀌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계곡은 관세음보살을 연호하는 소리로 넘쳐났다. 장엄한 그 소리는 부인사 경내를 진동하고 공산 자락을 타고 넘어 골골에 울려퍼졌다. 언제부턴가 농민군은 하나둘 농기구와 죽창을 버리고 합장하고 있었다. 훌쩍훌쩍 눈물을 뿌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몰매 맞고 죽은 이를 생각하며 울었고 배고팠던 날들이 서러워 울었다.

 목책 너머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승군들도 숙연해졌다. 오늘은 어쨌든 초상 치르는 날이었다. 상여를 메고 올라온 농민들은 싸움을 원치 않았다. 억울하게 죽은 대표의 시신을 앞세워 주지와 담판을 지으려는 것뿐이었다. 승군 장수가 절집으로 올라갔다. 그는 주지에게 농민군의 동태를 보고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 절 신도들이야. 불자들은 절대 절집을 해코지하지 못하지. 오래 못 버티고 철수할 테니까 적당히 겁이나 주면서 목책 잘 지켜!”

 주지는 매몰차게 원칙을 고수했다. 농민군과 협상할 뜻 같은 건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승군 장수는 머쓱해져서 터덜터덜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상여 위에 올라서 있던 마을 대표에게 다가와 알아듣게 타일렀다. 이래 봤자 아무 소용없으니 그만 돌아가서 양지바른 데다 묻어주라고. 어딘가 낯이 익은 마을 대표는 비장했다. 망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노라고 잘라 말했다.

 “난 저승사자 노릇 하고 싶지 않다네.”

 승군 장수가 도리질을 쳤다. 상여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굶어 죽으나 화살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외다.”

 어쩌다 신성한 절집 도량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더란 말인가. 도 닦자고 들어온 절집에서 중생을 몰살하는 악업을 지을 판이었다.

 “썩어가는 시신이나 매장하고 보세.”

 “우리는 주지의 사죄를 받고 나서 매장할 거요.”

 “그건 어렵네. 더 버텨보던지. 목책만 안 넘어오면 공격하지 않겠네.”

 “어서 목책을 치워주오. 주지를 만나야겠소.”

 “도리 없군. 이녁과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니 날 원망치는 마소.”

 “피장파장 이판사판이오.”

 서로 사정을 잘 아는 처지의 마을 대표와 승군 장수는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대화를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쉰 승군 장수는 목책 뒤로 몸을 뺐다.

 곧 점심때가 되었다. 농민군들은 주먹밥을 나눠 먹었고 승군들은 몇 개 조로 나뉘어 차례차례 절집에 올라가 공양을 하고 왔다. 이제야 술이 깬 화적패 두령이 마을 대표를 붙들고 작전을 짰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더 잘 먹고 싸움도 해본 놈이 더 잘하기 마련이었다. 마을 대표는 농민군 일부를 화적패 두령에게 배정해 주었다. 화적패 두령은 제 부하들과 농민군 수십 명을 이끌고 동산마을로 내려갔다.

 강도 진양부 최이의 저택에서는 김약선과 승려들 몇이서 비밀리에 다시 모였다. 승려들은 최이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아온 절집 출신들이었는데 주로 균여대사 계열의 화엄종파였다. 같은 화엄종이라도 부인사 같은 절은 의천 계열이었다. 해인사도 본래는 의천 계열이었으나 최이가 영향력을 행사해 균여 계열 승려들로 바꿔 심고 있었다.

 “경상도, 전라도에서 일어나는 민란이 날로 심각해져 갑니다. 지금 삼칠제, 사륙제 소작료 문제가 아닙니다. 민심이 이반되어 나라의 기틀이 무너져 가고 있어요. 지방관도, 승록사도 중앙의 통제망에서 하나둘 이탈해 가고 말입니다. 당장 올가을 조세부터가 제대로 올라올지 장담할 수 없게 됐습니다. 강화 천도 후유증이 이렇게 클 줄 몰랐습니다. 정권 유지 차원에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김약선의 언사에는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최이는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장계들을 펼쳐놓고서 한 손에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로는 콧수염을 쓸어올렸다.

 “몽골놈들이 재침한 판국에 어쩌면 좋으리까?”

 봉은사 주지가 최이를 쳐다보았다.

 “큰스님들! 많이 고민하고 드리는 말씀이올시다. 승군들을 동원합시다.”

 최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거란의 십만 대군을 물리쳤을 때처럼 몽골군과 전면전을 치릅시다. 중앙군과 지방군, 승군을 합치면 30만은 되오. 나도 이참에 사병들을 다 내놓을 참이오. 죽기살기로 맞짱 뜨면 제아무리 무적의 몽골 기마군단이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이번에 내려온 적들은 고작 삼천이라 하오.”

 최이는 주먹을 쥐며 입매를 야무지게 오므렸다.

 “몽골 기마군단은 머릿수로 따질 게 아니오. 놈들은 일당백이라서 절대 당해낼 수 없으니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전을 벌이자고 한 분이 바로 영공이었소이다.”

 한 노장 스님이 천도 논쟁 때 최이가 했던 주장을 상기시켰다.

 “천도하고서도 나라 기틀을 잡을 수 있다고 봤었소. 본토에서 잘 버텨줄 줄 알았단 말씀이오. 한데 당장 절집부터가 말썽을 일으키고 있잖소이까? 부인사 그놈의 절집은 예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숫제 초적 무리나 다름없소이다. 좌우간 승군을 동원해서 먼저 몽골군을 무찌르고 민란을 토벌합시다.”

 최이가 그렇게 나오자 승려들은 쩔쩔맸다. 살아 숨쉬는 것들은 눈에 띄기만 하면 모조리 베어버린다는 미친 칼바람. 홀연히 일어났다 피를 뿌리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는 저들이야말로 이승에서 지옥문을 여는 야차요, 염마졸들이었다.

 “왜 대답들이 없소이까? 나라가 있고 불교가 있는 거 아닙니까? 지금껏 내가 절집들을 건사했으니 이제 절집들이 나라를 위해 나서 주시오.”

 최이는 애원조로 나왔다. 승려들은 더 불편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고 하는 순간 황천길이 열릴 터였다. 모두가 눈을 감고 염주나 굴리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때 김약선이 나섰다.

 “몽골과 전면전도 피하고 흩어진 민심도 추스르는 묘안이 하나 있소만….”

 “장익공, 그게 무엇이오?”

 승려들이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최이는 가늘게 눈을 뜨고서 입가에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거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대장경을 새겨서 적들이 물러간 적이 있지요.”

 “나무 석가모니불!”

 “개경 흥왕사에 모셔뒀다가 지금 부인사로 이운한 바로 그 대장경입니다.”

 “한데요?”

 “이참에 대장경을 다시 조성하는 겁니다. 새긴 지 이백 년이나 지나서 너무 낡았고 보완해야 할 내용도 많이 늘었지요. 황실과 문무 대신, 불교계가 나서서 대장경을 재조한다면 불심 깊은 백성들을 능히 하나로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몽골군이 물러가길 바라고 하는 국책 판각사업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해야겠지요. 그럼 스님들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될 명분이 생깁니다. 판각작업을 주도해야 하니까요.”

 김약선은 깍지 낀 손짓을 하고서 눈알을 연방 굴렸다. 최이는 눈을 감고서 듣기만 했다.

 “오호, 최상의 방책이시오. 순욱, 정욱을 뺨치는 지혜요.”

 봉은사 주지가 손뼉을 쳤다. 말이 지혜지 모사였다. 어쨌거나 전쟁도 피하고 불심도 키울 수 있는 구실인 건 분명했다.

 “부인사 대장경이 온전한데 또 새긴다고 하면 백성들이 순순히 호응할까요?”

 한 스님이 물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놈의 부인사, 깡그리 불태워버리게 하면 그만입니다. 몽골군 별동대를 그쪽으로 유인하면 되니까요. 어차피 우리와 등 돌린 반대파들 아닙니까? 대장경 때문에 분급해 준 토지를 국고로 돌리면 소작쟁의도 한순간에 해결될 테니 꿩 먹고 알 먹고지요.”

 김약선은 거침이 없었다.

 “그래도 같은 불교 사원이고 부처님 말씀 담은 경판인데 그건 너무 심하오. 업보를 받을 일이란 말이오.”

 노장 스님이 반대를 하고 나왔다.

 “먹물 옷 입었다고 다 같은 스님인 줄 아시오? 그치들은 아귀들이나 다름없소. 모퉁이 하나 돌면 걸리는 게 절집인데 그깟 부인사 하나 없앤다고 문제 될 건 없어요. 내가 부인사보다 더 큰 절을 강도에 지어주겠소. 업보야 지금 우리 고려가 혹독하게 받고 있으니 더 받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질 않겠소이까?”

 한동안 듣고만 있던 최이가 조목조목 가리를 탔다. 김약선과 사전에 입을 맞춰놓고 결론으로 내몰고 있는 최이였다. 그는 보다 큰 정치적 사업을 위해 종교를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할 줄 아는 권력가였다. 그러기는 이미 권력과 재물 맛에 길들여진 사판승들도 마찬가지였다.

 “영공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판각불사 떡 벌어지게 한번 제대로 해봅시다!”

 얼굴에 기름기가 도는 승려들은 어렵지 않게 의견을 모았다.

 “내가 사재를 털어 절반가량의 비용을 분담하리다.”

 최이가 배포 크게 나왔다.

 “불은이오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승려들이 돌아가자 최이와 김약선은 곧바로 도방의 정예군들을 소집했다. 기마술에 능한 특전사들이었다. 부인사 일대의 지리를 잘 아는 승병들도 합류시켰다. 그들에게 몽골군 갑옷과 언월도가 지급되었다. 그것으로 무장하고 말에 오르면 그 순간 영락없는 몽골군 별동대였다. 그들은 즉시 포구로 나가서 두 척의 병선에 올랐다. 병선은 몽골군이 노략질하고 있는 육지를 피해서 서해를 돌아 남해 쪽으로 상륙할 계획이었다.

 그때 공산 자락 부인사는 다시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마을로 내려갔던 화적패와 농민군은 방패와 활 등을 준비해 가지고 올라왔다. 방패와 활을 보자 농민군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그들은 다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꽹과리와 징 소리까지 요란하게 울렸다. 전보다 훨씬 든든했다.

 선봉대가 방패로 앞을 막고 들이밀자 몇몇이서 나무통에 담아온 관솔기름을 목책에 뿌렸다.

 “쏴라!”

 승군들이 쏜 화살이 농민군 선봉대 쪽으로 쏟아졌다. 겁을 주기 위해 목책에 가한 사격이었지만 농민군 서넛이 그 화살에 맞고 고꾸라졌다. 그 광경을 본 농민군들의 눈이 뒤집어졌다. 이제는 주지의 사죄나 삼칠제 소작료 문제가 아니었다. 몽골군에게 잡혀 죽기도 전에 한 골짜기에서 살던 중들에게 몰살당할 판이었다. 화적패들이 목책에 불을 붙였다. 목책은 삽시에 불길에 휩싸였다. 농민군들도 응사했다. 승군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드디어 목책이 무너져내렸다. 그 틈으로 성난 농민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다. 승군들이 창과 칼을 뽑아 휘둘렀다. 농민군들도 쇠스랑과 죽창으로 맞섰다. 승군의 창과 칼을 뺏어든 농민군도 있었다. 피차간에 사상자가 늘어갔다. 싸움은 날이 어두워져서야 멈추었다. 시체들이 나뒹구는 골짜기는 곡소리, 비명소리로 여울졌다.

 사태를 보고받고서 호장은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몽골군들이 남하하고 있어서 성을 보수하고 보승군을 훈련시키기도 벅찼다. 하필 이런 때 피 튀기는 소작쟁의인가. 호장은 농민들이 옳다고 여겼지만 그렇다고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탐욕스러운 부인사 편을 들 생각은 더 없었다. 섣불리 전쟁터로 들어가 중재에 나서지도 못했다. 협상안이라고 들고 갈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색한 주지의 옹고집 탓이었다.

 이튿날, 읍사에 파발마가 들이닥쳤다. 황명이 적힌 조서(詔書)를 받아든 호장은 보승군 무리와 함께 부리나케 부인사 전쟁터로 말을 몰았다. 벌써 한 차례 더 전쟁을 치른 계곡은 생지옥이었다.

 “황명이오! 주지는 어서 나와 황제의 명령을 받으시오!”

 긴 나팔소리 끝에 호장이 조서를 들고 절집 마당에 들어서며 외쳤다. 그렇게 비싸게 굴던 주지가 금으로 수놓은 붉은 가사장삼을 걸치고 나와 무릎을 꿇었다. 호장은 조서를 펼쳐들고서 우렁차게 읽어 내렸다. 올가을부터 소작료를 사륙제로 내리라는 내용이었다.

글=소설가 김종록
일러스트=이용규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