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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며느리 "그 욕만 하면 日여자들이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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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배고픔보다 망국노(亡國奴·나라를 잃은 노예)란 놀림이 더 서러웠어.”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백암 박은식(1859∼1925년) 선생의 며느리 최윤신(94·사진) 할머니. 그가 상하이(上海)에서 겪은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던진 말이다. 백암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을 지냈다.

중앙SUNDAY는 3·1운동 제93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 집안의 며느리로 한평생을 살아온 최 할머니를 만났다. 독립운동가의 신산(辛酸)했던 삶과 민족교육의 뿌리를 되짚어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하이에는 800여 명의 한인이 거주했다. 교육의 중심은 한국혼(韓國魂)과 덕지체(德智體)를 모토로 한 ‘인성(仁成)학교’였다.

최 할머니는 네 살 때 상하이로 가서 25년간 중국 생활을 했다. 부친 최중호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하다 상하이로 망명했지만 43세(1934년)의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숨졌다. 어머니가 신문배달, 떡장수, 냉면집 등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2남2녀를 키웠다. 상하이 생활을 묻는 질문에 최 할머니는 “밥 굶는 게 보통이었고 배고파서 눈물을 질질 짜며 학교에 갔지. 고생한 것밖에 기억나지 않아”라고 말했다. 아버지 약값을 벌려고 인성학교(초등학교 과정) 졸업 후 프랑스 자수(刺繡) 놓는 일을 해야 했다. “자수를 일주일 놓으면 1원 받았어. 그걸로 약값을 댔는데 내가 학교에 못 가서 울면 아버지가 많이 속상해하셨지.” 당시 운동화 값이 20전이었으니 1원이면 큰돈이었다.
그러나 더 기막힌 일이 있었다. 인성학교를 졸업한 뒤 프랑스 가톨릭교단에서 세운 효명(曉明)학교에 진학했는데 ‘한국 망국노’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거기서 배운 과목 중 중국 역사가 제일 싫었어. 책에는 ‘한국이 왜놈한테 나라를 뺏겼다’고 나와. 중국 애들과 말다툼이라도 벌이면 ‘망국노∼ 망국노∼’ 하고 놀리는 거야. 나라 없는 설움, 기가 막혔어. 대꾸할 말도 없다는 게 더 화났어.”

인성학교는 이역만리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세운 학교였다. 학생 수는 가장 많을 때가 70여 명이었다. 전체 졸업생 숫자가 19년간 240명 남짓이다. 최 할머니는 “내가 1학년 때 교장은 여운형 선생, 졸업할 때는 김두봉 선생이었어. 졸업생 수가 우리 오빠(본명 최윤상·중국 이름 崔采) 때는 세 명, 나는 다섯 명이었지.” 어린 학생들의 눈에도 교사들의 생활은 참혹했다. “아침 8시에 가면 너덧 시간 공부했어. 근데 선생님이 부족하니까 자습 많이 했어. 선생님 한 분이 방 하나에 커튼을 쳐놓고 두 학년을 가르치니까…. 선생님들은 다 무보수였어. 선생님들도 배가 고팠을 텐데 열성껏 가르쳤어.” 교사들은 대부분 독립운동가였다. 별도의 생업을 갖고서 ‘새 나라의 인재’를 키우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인성학교에선 1930∼40년대 독립운동 세력을 갈라놓았던 좌우 대립도 없었다. 초대 교장 선우혁(1882∼미상) 선생 이후 손정도 목사와 여운홍(여운형의 동생)·안창호 선생이 번갈아 교장에 취임했으며 북한행을 택한 김두봉 선생도 5년 남짓 교장을 맡았다. 교사·졸업생 가운데도 좌익운동을 하다 북한으로 갔거나 중국에 귀화한 사람이 적지 않다. 최 할머니는 “김두봉 선생은 국어를 가르쳤어.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이북으로 가 김일성한테 다 소탕당했지”라고 덧붙였다. 또 “안중근 의사 동생(안공근)의 둘째 딸(안금생)이 한지성과 결혼했는데, 공산당 지하공작을 하던 한지성은 6·25 때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서울부시장까지 했다”고 말했다. 최 할머니의 오빠도 항일전쟁에 나섰다 1941년 팔로군에 참가해 4년 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설립을 주도한 데 이어 지린(吉林)성 전인대 상무위 부주임까지 지내다 2006년 세상을 떴다.

최윤신 할머니가 22일 박은식 선생의 초상화 아래 서 있다. 왼쪽은 박시창 선생의 동상. 작은 사진은 손녀 제니퍼 박 스타우트의 가족. 최정동 기자

최윤신 할머니는 백암 선생의 아들 박시창(1903∼1986) 전 광복회장을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꽃다운 19세였다. 박 전 회장은 중국군 장교였다. 황포군관학교 졸업 뒤 일본군과 싸우다 육군대학에서 2년간 최용덕·김홍일 장군과 함께 공부했다. 1943년 김구 선생의 권유로 광복군에 들어가 해방 후 국군 창설에 공을 세웠다. 59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노무현 정부 때 국가보훈처 장관을 지낸 박유철(74) 광복회장이 장남이다.

그래선지 최 할머니는 상해임시정부와 광복군 관련 인사들과 인연이 많다. 93년 시아버지(백암 선생) 유해를 송환하던 대목에 이르러선 한·중 양국과 미국·홍콩을 넘나드는 외교전의 막후를 소개했다. 상하이에서 살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면 금세 목소리가 젊어졌다. 친오빠(본명 최윤상·중국 이름 崔采)는 조선족 사회의 거목인 조남기 장군과 사돈관계다. 미국에 사는 둘째 아들(박유종·72)의 딸은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일한다. 제니퍼 박 스타우트(본명 박지영·36) 미 국무부 부차관보다. 최 할머니의 삶 속엔 이렇게 한국 근·현대의 영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2월 19, 22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사는 최 할머니를 만났다.

1 1931년 3·1절 기념행사 후 인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서 있다. 원으로 표시된 학생이 최윤신 할머니. 2 1926년 3월 8일 거행된 인성학교 제6회 졸업식. 맨 오른쪽이 최 할머니의 선친 최중호 선생. 3 동자군(童子軍·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촬영한 사진. 맨 왼쪽이 당시 동자군 대장이던 박성근 선생. 4 1935년 인성학교 폐교 당시 인성학교 교사·학생들. 5 인성학교 학생들이 불렀던 교가. 6 1925년 3월 제5회 졸업생인 김옥인의 인성학교 졸업증서. 김옥인은 간호사가 됐으나 북한으로 가 사망했다. 7 최윤신 할머니 자택에 걸려 있는 김구 선생 친필 액자. 1948년 남북협상을 하러 가기 직전 쓴 글씨다. ‘민족정기’(왼쪽), ‘철혈정신’.

-상하이 생활이 언제부터 기억나시나요.
“소학교 다닐 때 시아버지 장례식에 갔어. 그 양반 호상 줄을 학생들이 쥐고 따라갔는데 소학교, 중·고교 학생, 임정 인사들 순으로 뒤따랐어요. 그때 마병(馬兵)이 호위했는데 정안사로(靜安寺路) 만국공동묘지로 갔지.”

-인성학교 선후배들 좀 소개해 주세요.
“난 10회 졸업이야. 1930년. 여운형 선생의 둘째 아들 봉구는 오빠와 동기생이고, 그 밑에 홍구는 나와 동기야. 학생을 모두 합쳐도 쉰 명이 안 됐어. 이효상이란 동생은 폭탄을 만들어 왜놈들 죽이려다 잡혀서 사형 당했죠. 효상이 어머니도 자진하셨어.”

인성학교에선 당시 한글과 함께 국사, 본국지리, 한문, 산술, 이과(理科), 수공(手工) 등을 가르치고 4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쳤다. 체조·미술 시간도 있었다. 원로 언론인 우승규 선생은 1920년대 초 수업 모습을 이렇게 보도했다. “‘가갸거겨’ 하는 어린이들의 글 외는 소리가 중국인의 거리에서 이른 아침부터 들려온다. 혹은 ‘사랑 애(愛)’ ‘나라 국(國)’ 하는 한자 익히는 음성도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우승규, 『나절로 만필』, 탐구당, 1978년)

-학교 수업은 어땠나요.
“그때 2층 집을 얻어서 아래층은 홀(hall)로 썼어요. 체조·운동이나 집회를 했지. 2층은 방이 굉장히 컸어. 교무실·교장실 있고 방에 커튼을 치고 1, 2학년이 한 방 쓰는 식으로 공부했지. 큰 교실 하나에 작은 교실 세 개 있었나…. 중국에 살았지만 한국 역사, 지리 다 배웠어요.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 죽인 거, 이준 열사 이야기 배웠고 윤봉길 사건은 직접 겪었어요. 88년에 오빠랑 상하이 천문대로에 갔는데 학교 건물이 헐렸더라고.”

-선생님들도 기억나시는지.
“지리는 조완구씨, 국사는 윤기섭씨, 국어는 김두봉씨가 가르쳐줬지. 선우혁씨 사위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는데 무보수로 영어를 가르쳤어. 음악 선생은 애국지사 부인 신영선씨였어. 열성껏 가르쳤어. 잘못하면 벌을 세웠어. 배고픈 선생님들이 애가 터져라 가르치는데 딴짓 하면 얼마나 화가 나겠어.”

-영어나 중국어·일본어는 언제부터 배우셨어요.
“일찍 한문 배웠고, 4학년부터 ABCD 시작했어요. 영어는 제일 좋아했어요. 선생님은 김종상씨, 선우혁씨였죠. 인성학교 때는 중국어 안 배웠어. 동네 중국 애들과는 이야기했지만. 일본어는 절대 모르죠. 한 가지 아는 게 있어요. 바카야로. 왜놈들 만나면 졸졸 따라다니면서 ‘바카야로, 바카야로’ 하고 쫓아다녔어요. 그 욕만 하면 일본 여자들이 날뛰더라고.”(이 대목에서 할머니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셨나 보네요.
“장난 많이 쳤지. 다들 나보고 ‘깍쟁이’라고 했어. 영어를 잘했고 수 놓는 거 잘했어.”

-독립운동가끼리 급한 연락이 있으면 학생들을 통해 했다던데요.
“일본 놈들이 프랑스 조계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어. ‘강도가 너희 조계에 숨었으니 잡아야겠다’고 통보한 뒤에야 들어왔지. 프랑스 영사관에선 엄항섭씨에게 귀띔해줬지. 그러면 선생님들이 ‘왜놈 나온다’ ‘강도 잡으러 온다’고 말해. 각자 집에 가서 이야기하면 피할 사람은 다 피해. 윤봉길 의사 사건 때는 김구 선생님이 사람을 시켜서 우리 아버지 피신시키라고 그러셨대.”

-인성학교 졸업 후 어디서 공부하셨나요.
“불란서 천주교에서 세운 효명(曉明)학교에 갔어. 유명한 학교니까 부자들은 굉장히 부자였죠. 없는 집 애들은 학비가 공짜였어. 우리 중에선 인스펙터(전차 검표원) 하는 집이 제일 부자였어요. 기숙사도 공짜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잠옷, 속옷이 너무 남루해서 창피 당할까 봐 집에서 통학했어요. 집이 포동(浦東) 근처였는데 학교까지 걸어서 한 시간 반이 걸렸어요. 아침밥 굶고 학교 가면 기진맥진이었지. 그때쯤 기숙사 학생들이 밥을 먹고 있어. 나는 수업 때까지 학교 마당에 앉아 책을 보곤 했죠. 하루는 수녀 선생이 ‘아침 먹었느냐’고 묻더니 나를 찬찬히 쳐다봐. 말 없이 서 있었더니 ‘내일부턴 아침·점심을 함께 먹어라’고 하데요.(웃음)”

-그때 하루에 세 시간씩 걸어 다녀서 지금도 건강하신 것 아닌가요.
“내가 건강한 편이었어요.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는데 인스펙터 집 애들은 인력거나 전차를 탔어. 믿음을 가지고 사니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니깐…우리는 할머니부터 신실한 교인이었어요.”

-93년에 박은식 선생의 유해 봉환은 어떻게 추진됐나요.
“한·중 수교 전인 84년에 오빠 큰딸(崔慰慈)이 서울 왔을 때 우리 영감(박시창 선생)이 ‘한국으로 모셔라’고 신신당부했어요. 그런데 그 묘소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거예요. 추적해 보니 손문(孫文) 선생의 부인 송경령(宋慶齡) 묘역으로 갔다고 해요. 그러다 유해 봉환 추진 사실이 덜컥 한국 신문에 보도됐어요(85년 1월 10일). 난리가 났죠. 이북에서 ‘백암은 황해도 사람이고 애국열사인데 왜 남조선에 유해를 보내느냐’고 항의했답니다. 그래서 내가 미국에 사는 둘째 딸한테 가서 미국 영주권을 만들었어요. 한국과는 외교관계가 없으니 마음대로 중국을 못 다니잖아요. 오빠도 그때 은퇴했기 때문에 미국으로 초청해 함께 중국으로 들어갔죠. 중국 외교부에선 ‘이북과는 40년 친구인데 너희를 도와주면 배신자가 되는 것 아니냐’며 허가를 내주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87년부터 매년 한두 번씩 가서 ‘부모자식 관계가 외교 관계보다 더 중요하지 않으냐’고 따졌죠. 그러다 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 측에 직접 요청을 해서 성사됐어요. 93년 8월 시아버님과 네 분을 모셔왔어요. 95년엔 양기탁 선생도 모셨어요(큰아들 박유철 광복회장의 부인은 양기탁 선생의 장손녀다. 유해는 모두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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