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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만의 것...죽음도 매혹시킨 뮤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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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호 16면

이토록 꽉 찬 무대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 2중 회전무대, 3개의 리프트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19세기 유럽 황실, 350벌의 눈부신 의상을 바쁘게 갈아입으며 등장하는 최고의 배우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과 안무. 관객의 눈과 귀는 유례없이 분주하다.무대가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함의 극치, 뮤지컬 ‘엘리자벳’의 막이 올랐다. 1992년 오스트리아 빈 초연 이래 20년 동안 세계 10개국에서 9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독일어권 최고의 흥행대작. 국내에 먼저 소개된 ‘모차르트!’의 미하엘 쿤체, 실베스타 르베이 콤비가 강렬함으로 승부하는 빈 뮤지컬 시대를 열어젖힌 작품이다. 일본에서는 96년 남장 여배우로 유명한 다카라즈카 버전으로 큰 인기를 얻어 고정 레퍼토리가 됐고, 2000년 도호뮤지컬이 가세해 2개의 버전이 경쟁하며 본고장 유럽에서보다 더 자주 공연되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뮤지컬 ‘엘리자벳’, 5월 13일까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19세기 말, 500여 년간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혼기.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던 황실의 끝자락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던 ‘19세기의 다이애나’ 황후 엘리자벳은 아름다운 외모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끝없이 황실을 겉돌다 여행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영화와 소설로 끊임없이 재탄생된 뮤즈의 일대기를 무대화한 이 서사극은 브로드웨이의 고전 ‘에비타’를 계승하고 있다. 작가 쿤체가 창작 작업 이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번안작업을 했던 첫 작품이 바로 ‘에비타’였다. 엘리자벳의 암살범이자 극의 화자로 무대 안팎을 넘나들며 유머와 비아냥을 적절히 섞어 그녀의 삶을 ‘키치’로 일갈하는 아나키스트 루케니는 ‘에비타’의 화자 ‘체’를 확장시킨 캐릭터다.

그런데 이 작품이 ‘에비타’를 훌쩍 뛰어넘는 재미와 감흥을 주는 것은 초현실적인 캐릭터 ‘죽음’의 존재 때문이다. 엘리자벳을 평생 따라다닌 죽음의 그림자를 매력적인 미청년의 유혹으로 의인화하고, ‘죽음’과의 사랑이라는 위험한 줄다리기를 축으로 서사극에 판타지의 감흥을 입혔다. ‘죽음의 천사’들을 대동하고 갈등의 고비마다 공중브리지를 미끄러져 내려오거나 리프트를 타고 강림해 무대를 지배하는 신비로운 ‘죽음’의 존재는 황태자 루돌프, 황제 요제프 등 그녀 주변의 인물들과 부딪치며 강한 스펙터클을 생산한다.

전율하는 음악도 힘이 세다. 프롤로그부터 엘리자벳의 인생을 증언하러 일어난 황실의 유령들이 군무와 강렬한 합창으로 객석을 압도한다. 숨막히는 황실의 규범과 싸우며 자유를 외치는 엘리자벳의 소름 돋는 솔로 ‘나는 나만의 것’을 비롯해 ‘그림자는 길어지고’ ‘마지막 춤’ ‘내가 춤추고 싶을 때’ 등 클래식을 바탕으로 록음악의 강한 비트를 가미한 개성적인 곡들이 저마다 귓전을 때린다. 주연급 조연들이 대거 포진해 누구 하나 처지지 않는 탄탄한 가창력의 경합 또한 황홀의 경지다.

꽉 짜인 1막에 비해 다소 느슨한 2막은 원작의 한계다. ‘죽음’의 역할이 제한적이기 때문. 이미 자유를 쟁취한 엘리자벳을 긴장시킬 수 있는 것은 ‘죽음’의 강력한 구속뿐이지만, 몰락의 배후에서 인간을 조롱하는 ‘죽음’의 입지는 크지 않다. 다카라즈카 버전은 이미 해답을 냈다. 남장 여배우를 내세우는 양식 덕분이지만, ‘차가운 사신(死神)’이라는 원작의 이미지를 넘어 엘리자벳에 대한 감정이 강화된 ‘죽음’의 집요한 사랑을 전면에 부각시켜 끝까지 몰입을 유도했다. 루케니 역할을 나눠 가진 ‘죽음’은 모든 갈등국면을 주도하며 감정을 터뜨리고, 이 버전을 위해 추가된 ‘죽음’의 솔로 ‘사랑과 죽음의 윤무’는 죽음과의 사랑이라는 초현실적인 설정에 현실감을 주는 가사로 극의 무게중심을 잡았다. 수퍼스타도 인간적 모습을 보일 때 감동을 주는 법. 차가운 카리스마의 ‘죽음’이 죽음보다 삶을 사랑했던 엘리자벳 뒤에서 쓸쓸히 질투를 삼키는 감정연기로 객석을 구속할 때 이 전율하는 무대는 더욱 특별해질 것이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합스부르크 왕가
15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독차지한 유럽 최대의 왕가. 19세기까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스페인, 이탈리아,벨기에, 네덜란드에 이르는 넓은 유럽 영토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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