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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약속 지키기 너무 괴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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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특별히 수강신청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나 수강할 수 있지만 아무나 수강할 수 없다. 담당 교수의 인간성이나 성격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다. 출석은 칼날처럼 체크한다. 한두 번 지각이나 결석을 할 경우 학점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아, 여학생의 경우 스니커즈를 북백에 챙겨 넣고 다니는 것이 좋겠다. 여차하면 신촌역에서 강의실을 향해 체력장 속력으로 뛰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강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분은 단연코 수강신청을 하지 않아야 한다. 추후 딴말하기 없기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임을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란다.”

 해마다 나는 강의 계획서에 이 같은 나름대로의 원칙을 제시해 두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강의 첫날, 어떤 경우라도 지각·결석을 두 번 이상 할 경우 F학점을 준다고 못박고 예외 없이 실천하고 있다. 과제물도 기한을 넘기면 받지 않는다. 종강 당일 복도에 예닐곱 학부모와 오토바이 택배가 과제물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을 종종 본다. 연락을 받고 황급하게 달려온 어머니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고 환한 얼굴로 과제물을 받는다.

 이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나의 말에 대해 상당히 신중해진다. 12월 종강에 앞서 이번 겨울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종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제자는 물론 주위의 많은 분이 동참을 선언했고, 약속한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이 같은 결심에 걱정하는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겨울 자전거, 그것도 내리 일주일간 500㎞를 달리려는 시도는, 청계산 가본 사람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그러면서도 워낙 뱉은 말 지키기에 목숨 거는 나의 무식한 성격을 알기에, 온갖 자료를 들이대며 만류해 온다. 심지어 3만원짜리 보통 자전거로 간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고가의 MTB를 빌려주겠다던 늙은 제자까지 돌아섰다. 겨울 종주라는 말에 놀라 아내에게 동의 각서를 받아야만 빌려주겠다고 한다. 과부나 불구자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돌아선 이유다.

 나는 “무모함을 연민한다.” 그래서 생을 통해 무모한 일을 시도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path finder”이지만, 달리 말하면 비합리적이란 의미가 된다. 무모함에 의지해 좋다는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30대 후반에 늦깎이 유학을 떠났다. 남들이 평생 한 번 하기 힘들다는 지리산 종주도 수십 차례 했고, 유학 시절 빙하의 로키 마운틴을 오르기도 했다. 위험하다는 스노보드 타는 재미도 근래 알았다.

 그러나 약속 지키기란 언제나 녹록지 않다. 언젠가 대학원 노총각 제자 결혼식이 남해안 어디에서 있었다. 10명이 넘는 지인이 약속했지만 임박해서는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내세우며 주저앉았다. 결혼식 당일 버스로, 비행기로, 택시로 무려 왕복 12시간을 혼자 다녀왔다. 몇만원 부조에 여비만 수십만원을 허비한 셈이다. 그러나 그런 나에 대해 큰 불만은 없다.

 많은 사람이 약속하지만 대부분 허공에 날아간다. 실제로 지켜지는 경우가 많아 보이진 않는다. 이제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은 그냥 “잘 가라”는 정도로 이해되는 세상이다. 나는 이 같은 ‘남·여아일언 풍선껌’, 즉 말들의 가벼움에 약간은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후쿠야마는 한국은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심각한 저신뢰 사회라고 혹평하지 않았던가. 런던의 옛 증권거래소에는 ‘나의 말은 나의 문서(Dictum Meum Pactum)’라는 경구가 있다.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서, 섬나라 영국을 한때 세계 최고 국가로 만들어준 금언이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중히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그러나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 경부 자전거 종주 때문에 여간 심란한 것이 아니다. 뱉은 말을 지키려니 사고가 겁나고, 이쯤 해서 거둬들이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동참을 약속한 제자 등 주위 사람들도 말은 못하지만 그만뒀으면 하는 눈치로 내 입만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 하루하루가 너무 괴롭다.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