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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꼭대기에 펼친 기괴한 유토피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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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호 09면

3‘나의 거대한 서사 Mon grand récit’(2005),약 280x440x300㎝. Courtesy: Taipei Biennial.

도쿄 롯폰기힐스 모리타워 53층. 갑자기 키 큰 공간이 나타난다. 영어로 ‘모리 아트뮤지엄’이라고 써 있다. 에스컬레이터 옆 바람벽에는 ‘LEE BUL’이라는 글씨와 작품 사진이 크게 프린트된 거대한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전시 제목인 ‘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는 작가의 남편이 작가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나의 거대한 서사’라는 작품을 하면서 슬럼프에 빠져 있던 작가를 곧추세워 준 사랑과 응원이 듬뿍 담긴 글귀다. 전시를 기획한 가타오카 마미 모리미술관 수석큐레이터는 “이불은 지난 20여 년간 인간의 불완전한 존재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을 던졌던 작가”라고 평했다.

도쿄 모리미술관의 이불 회고전

전시장은 ‘덧없는 존재’ ‘인간을 넘어서’ ‘유토피아와 이상의 풍경’ ‘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 네 가지 주제와 작가의 스튜디오를 옮겨 온 듯한 ‘스튜디오’로 구성돼 있다. 작가의 시기별 대표작 45점과 드로잉 등 소품 200여 점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첫 번째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잔뜩 부풀어 오른 붉은색 보디슈트 차림으로 도쿄시내를 12일간 활보하던 작가의 1990년 퍼포먼스 영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낀 줄 아느냐’라는 작품이다. 최승자 시인의 시에서 한 구절을 따왔다. 기묘한 촉수로 가득 찬 묘한 불쾌감을 주는, 그때 입었던 옷이 거대한 고깃덩이처럼 허공에 떠 있다.

4 전시장 입구 5 전시장 모습

97년 뉴욕 현대미술관을 생선 썩는 냄새로 발칵 뒤집어 놓았던 ‘화엄’은 당시 모습을 영상으로 천천히 보여준다. 충격은 이어진다. 반짝이는 조각으로 가득한 웨딩드레스는 화려해 보이지만 왠지 쓸쓸하고,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이보그는 한쪽 팔과 다리가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다. 최첨단 1인용 스포츠카 모습의 가라오케는 어떤가. 혼자 노래할 수 있는 이 공간의 해치백을 닫으면 영락없는 관이다.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 노래하는 현대인의 외로움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낡은 욕조에 검정 잉크를 붓고 욕조 주위를 흰색 요철로 쌓아올린 ‘천지’는 한국 근대사의 정치적 그림자를 은유하는 듯하다.

또 바이마르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꿈꾸던 수정도시를 연상케 하는 대형 설치작업 ‘나의 거대한 서사’ 연작과 에스페란토가 네온으로 깜빡이는 거대한 철탑 등을 통해 작가는 관람객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요구한다.

마지막 코너는 올해 완성한 신작 ‘비밀 공유자’가 강렬하게 장식한다. 도쿄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유리벽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산산이 토해 내고 있는 크리스털 개다. 좌충우돌 세상과 싸워 온 작가가 20년 세월을 모조리 게워내고 산화하는 듯하다. 그런 개를 그 뒤에서 안쓰러워하는 자태로 바라보고 있는 반짝이 여성 형상 작품 역시 작가의 페르소나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트컨설턴트 강희경씨는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은 이불이 추구해 온 미학의 주요한 흐름”이라며 “20년간의 족적을 한눈에 보니 맥락이 훨씬 잘 이해됐다”고 말했다. 한편 3일 오후 열린 개막식에는 국내 미술계에서 원로작가 이우환을 비롯해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 이용우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김선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정준모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이추영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박경미 PKM 갤러리 대표 등이 참석했다.

또 엔리코 룽기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장, 에르베 샹데스 파리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 대표, 알렉산드라 몬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아시아미술부문 수석큐레이터, 뉴욕 리먼 모핀 갤러리 레이철 리먼 대표와 일본 미술계 관계자 등 2500명이 참석해 큰 성황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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