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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배낭여행 전도사 박재균·양미화 부부

중앙일보

입력

직업 상 언제 어디서나 격식을 갖춰야 했던 박재균·양미화 부부. 이제는 배낭을 둘러멘 모습이 그 누구보다도 자연스럽다.

“육군 준장으로 전역한 제가 배낭을 메기까지 망설임도 많았습니다. 행여 공항에서 옛 부하들을 마주치진 않을까,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진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용기가 나지 않았죠. 하지만 어느 순간, 망설임보다 더 큰 수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재균(57)·양미화(56) 부부는 자타공인 배낭여행 전도사다. 지인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낭여행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개인 블로그,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리며 후일담을 나눈다. 2009년부터 약 3년간 부부가 함께 다녀온 곳은 인도, 네팔, 남미. 아내가 체력을 충전할 동안 박씨 혼자서는 산티아고 순례, 시베리아 횡단, 우리나라 국토종단을 마쳤다. “예전엔 1박 2일 동안 동해안을 둘러보고 오는 것이 부부여행의 전부였다”는 박씨는 “지금은 배낭여행 중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나를 옭아맸던 겉치레 훌훌 털어

박씨는 2008년 11월을 잊지 못한다. 32년간의 공직생활에서 은퇴한 그 시점을 두고 ‘한방 먹은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일을 한 순간에 놓아야 하는 상실감은 생각보다 컸다. 설상가상으로 은퇴 후에 계획했던 일까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 때 ‘산티아고 가는 길’이란 TV다큐멘터리를 봤어요.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던 전 ‘바로 저거다’싶었죠.”

여행이든 운동이든, 시작을 앞둔 사람이 걸어가는 가장 먼 거리는 ‘방 안에서 현관문까지’란 말이 있다. 박씨도 여행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오랜 고민이 있었지만 배낭을 짊어진 순간부터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한달 간의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 온지 5개월 만에 다시 아내와 함께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군인의 아내로서 32년간 통제 속에 살아 온양씨는 처음 배낭여행을 권하는 남편의 말에 무척 홀가분해지면서 가슴 벅참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걱정이 치고 올라왔다. 남편 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순수 배낭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에 도착하고 몇 일 간은 서로 보초를 서면서 잘 정도로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며칠 지나보니까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더라고요. 차츰 사람 사귀는 맛도 알고 물건 값 깎는 재미도 알고. 현지인 다 됐었죠.”

물론 부부의 여행길이 고운 비단길 같지만은 않았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서도 같은 길을 돌고 돌기도 하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한 발을 내딛기가 버거울 때가 있었다. 또 숙식의 불편함은 물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땅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버거웠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행 후의 만족감이 더 컸다. “오로지 나만의 계획에 의해 무사히 여행을 마쳤을 때의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는 박씨는 “지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또 “내가 직접 성취감을 맛 봤기에 다른 중년들에게 배낭여행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게 됐다”며 “배낭여행의 경우 같은 값으로 여행사 패키지 상품보다 두 배 이상 길게 체류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덧붙였다.

삶에 지친 중년에 딱 맞는 처방

이들 부부는 배낭여행으로 중년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을 ‘젊음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점’으로 꼽았다. 박씨는 “배낭을 짊어지면서, 나를 옭아 메던 체면과 겉치레를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며 “주위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자 생각과 행동도 젊어졌다”고 했다. 아내 양씨는 “출국 두 달 전부터 해당 나라의 정보를 찾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면서 하루하루를 기대감으로 산다”고 한다. 이어 “여행 동안에는 엔도르핀이 솟고, 여행 후엔 블로그·카페에서 추억을 정리하며 성취감에 찬 두 달을 보낼 수 있다”고 전한다.배낭여행 기간은 한 달이라도, 그 여운은 약 6개월 간 지속된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삶에 지친 중년에게 딱 맞은 처방이라는 것이다.

지난 12월 남미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은 올 3월 다시 아프리카 종주를 떠날 계획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과 동행하기에 부부의 배낭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다. 물론 여행 중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부부에겐 가장 값진 시간이란다. “여행가서 24시간을 붙어 있다 보니 속속들이 잘 알게 돼 지금은 많은 부분을 이해해주고 넘어간다”는 양씨는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또 있었나 싶다”고 한다. 새로운 세상을 앞두고 다시 찾아 온 설렘, 활짝 웃는 부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한다혜 기자 blushe@joongang.co.kr 사진="김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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