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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33) 은행 구조조정 <6> 상업·한일 합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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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998년 7월 31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에서 배찬병 상업은행장(왼쪽)과 이관우 한일은행장이 합병 발표 후 환하게 웃고 있다. 6월 말 은행 경영평가에서 ‘조건부 승인’ 판정을 받은 두 은행은 양자 합병을 통한 생존을 선택했다. [중앙포토]

배찬병 전 상업은행장과 이관우 전 한일은행장. 1998년 7월의 두 사람은 닮은꼴이었다. 우선 자신이 이끌고 있는 은행이 벼랑 끝에 서 있었다. 6월 말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조건부 승인’ 판정을 받았다. 살기 위해선 한 달 안에 경영 정상화 계획을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한복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을 한 달 안에 내놓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두 사람 모두 답을 못 찾아 고민 중인 점도 같았다. 게다가 둘은 연세대 경제학과 동문, 비교적 서로 잘 통했다. 현실감각이 뛰어나다는 점도 비슷했다. “상업과 한일이 합병하면 어떠냐”는 내 제안에 두 은행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이런 닮은꼴도 한몫했을 것이다.

 98년 7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감위원장실. 배찬병 상업은행장과 이관우 한일은행장이 함께 위원장실로 들어왔다. 배찬병은 대뜸 결론부터 꺼냈다.

 “위원장님. 우리 합병하기로 했습니다.”

 “둘이 합병하면 어떠냐”는 내 제안이 열흘쯤 됐나. 그 사이에 합병을 결심한 것이다. 하긴 요즘처럼 한가한 때가 아니었다. 하루를 한 달처럼 쓰던 때였다. 나는 며칠 전 “7월 말과 8월 1일은 다르다”며 7월까지 경영 정상화 계획을 내라고 한 차례 압박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정말 큰일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부가 최대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진심이었다. 외자 유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난 무렵이었다. 위태로운 은행들이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은 합병밖에 없다고 봤다. ‘1+1=1.2’, ‘합병 후 인력은 2가 아니라 1.2가 돼야 한다’ 는 논리, “합치고 규모를 줄여라. 그러면 공적자금을 넣어 주겠다.” 이게 국민 세금을 은행에 넣기 위한 정부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합병을 앞둔 두 은행은 서로 ‘누가 행장을 맡을 것인가’를 두고 기싸움을 하기 마련이다. 행장으로선 자기 자리가 위태롭다 싶으면 당연히 합병 논의를 피하고 싶을 터. 상업·한일이 이렇게 빠른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배찬병·이관우 행장 모두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합병은 다른 은행에 신호탄이 될 것이다’. 은행 구조조정의 실마리가 한 가닥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럼 발표는 언제 하시겠습니까.”

 “8월 1일에 하려고 합니다.”

 이틀 뒤. 늦은 시점은 아니다. 하지만…. 다급한 결정을 내리고 왔을 이들에게 나는 한 번 더 고삐를 죈다.

 “끌지 마세요. 기왕 결심하셨으니 바로 발표하십시오. 7월 말과 8월 1일은 다릅니다.”

 합병은 행장뿐 아니라 모든 직원과 시장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일이다. 이 합병이 소문나면 어떤 방해 세력이 나타날지 모른다. 퇴출을 막겠다며 노조가 행장을 감금하고 전산키를 빼돌리는 사태도 지켜본 나다. “바로 발표해 달라”는 부탁은 말 그대로였다. 두 행장이 내 방을 나가 바로 발표장으로 향하길 기대했다. 이관우 행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어서며 작은 목소리로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두 행장이 방을 나서기 전, 나는 한 번 더 언질을 줬다. “지원은 아끼지 않을 겁니다.” 나중에 이들은 나를 야속하게 생각했을까. 이렇게 출범한 상업+한일의 합병은행 한빛은행에 정부는 충분한 공적 자금을 지원하지 못했다.

 둘은 하루 뒤인 31일 오전 합병을 발표했다. 전국이 떠들썩했다. 합병 후 총자산 105조원. 국내 최대 규모였다. 자산 기준 세계 100위권에 드는 은행이 처음 나온 것이다. ‘공룡 은행의 탄생’ ‘은행 빅뱅의 신호탄’ 언론도 대서 특필했다.

 “이 합병이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내 기대는 들어맞았다. 조흥은행은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다급한 처지가 됐다. 상업·한일과 함께 조건부 승인을 받았던 조흥이다. 외환은행처럼 외자 유치도 하지 못했다. 하나은행도 일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충청은행을 이미 인수한 상황, 예정돼 있던 보람은행과의 합병을 9월 초 발표한다. 한 해에 충청·보람 두 개 은행과의 합병. 이는 98년 초만 해도 10위권 바깥이던 하나은행이 오늘날 4대 금융지주사로 성장하는 발판이 된다.

 돌아보면 이때 부실 은행을 인수한 앵커(Anchor·닻) 역할을 했던 은행들은 모두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대형 은행으로 성장했다. 당시 내가 “우리나라에 선도 은행은 서너 개다”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도 이것을 가리킨 말이었다. 인수합병을 통해 덩치와 경쟁력을 키운 은행들이 시장을 주도할 것이란 뜻이었다. 시장의 질서는 끊임없이 변한다. 하지만 위기 상황만큼 질서를 제대로 바꿀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등장인물

▶배찬병(75) 전 상업은행장

한국상업은행에 행원으로 입사해 1998년 행장에 취임했다. 은행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98년 중반, 전격적으로 한일은행과의 합병을 결정하고 용퇴했다. 99년부터 6년간 생명보험협회장을 지낸다.

▶이관우(76) 전 한일은행장

역시 한일은행 행원 출신. 연세대 경제학과 동문인 배찬병 전 상업은행장과 함께 합병 결단을 이끈 인물. 이후 물러나 한진해운·금호종합금융 등의 사외이사를 지냈다. 세종대왕기념탑건립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역임했다. 한·몽골협력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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