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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부친에게 ‘당하지 않는 법’ 배워 美 최고 갑부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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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호 25면

록펠러의 공과(功過)를 둘러싼 논란은 오늘도 계속된다. 많은 위법을 저질렀으나 새로운 자선사업의 시대를 열었다.

사후에 재평가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뜨기 전에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되면 더 좋다. 미국의 석유왕 존 D 록펠러(1839~1937)가 그런 경우다. 록펠러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다. 뉴욕 타임스의 2007년 7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역대 부자 1위인 록펠러의 재산은 1920억 달러였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820억 달러로 5위였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5> 존 록펠러

설립한 대학서 노벨상 111명 배출
록펠러는 빌 게이츠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둘 다 새로운 산업 분야(석유·소프트웨어)의 가능성을 남들보다 앞서 알아챘다. 둘 다 자선왕이다. 록펠러는 ‘기업 자본주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근대적 자선사업의 아버지’다. 역사적으로 뜻있는 부자들은 항상 기부를 해 왔다. 그러나 록펠러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와 더불어 ‘과학적 기부(scientific giving)’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록펠러는 병원·학교·고아원과 같이 돈이 필요한 곳을 후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자선사업에 기업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자선이 기업활동 못지않게 체계적·전략적으로 추진됐다. 특히 교육·의학 연구 후원 사업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1889년 설립한 시카고대와 1901년 설립한 록펠러대는 각각 87명, 2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록펠러가 태어났을 때는 사람들이 노예를 소유했던 시대였다. 록펠러는 유대인을 싫어했지만 인종주의에는 반대했다. 해방 노예들의 복지를 위해 힘썼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스펠먼 칼리지를 후원한 것도 돋보인다. 해방 노예와 그 딸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된 학교였다. 1929년 건립된 뉴욕현대미술관도 그의 업적이다.

록펠러는 1897년부터 1937년 사망할 때까지 여생을 자선사업에 바쳤다. 신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자선사업가’의 서거를 애도하는 부고 기사를 냈다. 자선왕이 되기 전 돈 버는 데 주력하는 과정에서 그는 ‘악덕 자본가(robber baron)’의 표본으로 낙인찍혔다. 사회주의자에게 록펠러는 자본주의가 망할 것이며 또한 망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 사례였다. 이념에 관심 없는 상당수 일반인에게도 록펠러는 ‘최악의 범죄자’였다.

1877년 38세에 불과한 록펠러는 미국에서 정유산업의 90%, 원유 채굴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그의 회사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위해 정치인·언론인을 매수했으며 산업 스파이를 고용했다. 파이프라인으로 석유를 운송하는 시스템을 개발한 것은 록펠러였는데, 그는 경쟁 회사들이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파이프라인 통과 길목을 사들여 일종의 ‘알박기’를 했다. 비밀리에 철도당국으로부터 운송료 할인을 받아 경쟁사들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다. 노조 활동도 탄압했다. 1914년에는 러들로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록펠러가 소유한 탄광의 근로자 2만여 명이 일으킨 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0여 명이 사망했다.

스탠더드석유회사의 죄상을 폭로한 것은 아이다 타벨(1857~1944)이라는 저널리스트였다. 타벨은 1902~1905년 ‘매클루어 매거진’에 19회에 걸쳐 ‘스탠더드석유회사의 역사’를 연재해 부정을 파헤쳤다. 퇴사 종업원들과 면담해 충격적인 내용을 확보했다. 탐사보도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는 기사였다. 록펠러는 타벨의 주장에 흠집을 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지나친 독점도 문제였다. 셔먼 독점급지법(1890년)에 따라 대법원은 1911년 스탠더드석유회사를 34개로 쪼갤 것을 명령했다. 34개 회사의 주식을 소유한 록펠러는 더 큰 부자가 됐다. 이런저런 이유로 1900년 초반 록펠러는 미국에서 ‘공공의 적’이었다.

7세부터 칠면조 키워 팔아
비록 공공의 적이었지만 록펠러는 가장 미국적인 자수성가형 거부였다.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됐다. 고등학교마저 1855년 졸업을 두 달 앞두고 중퇴했다. 직업학교에서 몇 달간 상업을 배우고 취업을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해 9월 26일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다. 이듬해 1월 1일까지는 급료도 받지 못했지만 뛸 듯이 기뻤다. 취업에 실패하면 집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했던 록펠러는 평생 매년 9월 26일을 ‘일자리의 날(job day)’로 삼고 생일 못지않게 중시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는 보통이었지만 숫자에는 밝았다. 암산 능력이 비상했다. 말단 직원으로 출발했지만 근검절약으로 돈을 모아 1863년 클리블랜드 정유공장에 지인들과 공동 투자할 만한 종잣돈을 모았다.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의 농촌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인 1859년이었다. 당시에는 등불을 켜는 데 쓰이는 등유가 석유의 주력 제품이었다. 토머스 에디슨이 내구성 있는 전구를 발명한 것은 1878년이었다. 자동차 시대의 개막 훨씬 이전이었다. 석유가 ‘검은 황금’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록펠러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1870년 스탠더드석유회사를 창립했고 1872년에는 클리블랜드에 있는 경쟁사 26개 중 22개를 단 6주 만에 흡수했다.
다른 거목들과 마찬가지로 록펠러를 록펠러로 만든 것은 아버지 윌리엄과 어머니 일리자였다. 부모에게서 왕초보 비즈니스를 배웠다. 록펠러는 어머니 지도하에 7세부터 칠면조를 키워 팔았다. 판매 수입으로 돈놀이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속을 끓였다. 강간 혐의로 온 가족이 이주해야 한 적도 있었고, 애인을 집에 데려오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디 간다,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집을 비웠다. 급기야 1855년에는 25살이나 어린 여자와 중혼(重婚) 생활에 들어갔다. 스스로를 ‘닥터’라고 부르는 아버지 윌리엄은 아무 효험이 없는 약을 순박한 사람들에게 암 치료제, 만병통치약이라며 팔았다.

록펠러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한심한 아버지이지만 그로부터 배운 게 많았다고 술회했다. 기업인 록펠러는 그 누구에게도 당하는 법이 없었다. 사기꾼인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다. 록펠러는 지출 내역을 센트까지 장부에 기입했다. 역시 아버지로부터 배운 습관이었다. 은행을 불신한 것도 아버지 영향이 컸다.

술 나오는 행사는 아예 불참
록펠러는 20세부터 교회에 십일조 헌금을 했다. 부계의 뿌리는 박해를 피해 독일로 피신한 프랑스 위그노 교도였다. 록펠러(Rockefeller)의 원래 철자는 로슈푀이유(Rochefeuille) 혹은 로크푀이유(Rocquefeuille)였다. 그의 조상은 독일에서 다시 1720년 펜실베이니아주로 이주해 정착했다. 어머니는 독실한 침례교인이었다. 록펠러는 평생 술·담배, 그리고 아내를 제외하곤 여자를 멀리했다. 9년에 걸친 구애 끝에 1864년 결혼한 아내 로라 스펠먼도 신심이 두터웠다. 부부는 술을 서빙하는 행사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자선사업을 할 때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려고 했다.

엄청난 재물을 모았지만 록펠러는 “인간이 소유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정당한 방법으로 축재했다고 믿었다. 죄의식이나 후회는 없었다. 그는 신(神) 앞에서 당당했다. 록펠러가 자선사업에 나선 것은 죄책감을 씻거나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침례교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스탠더드석유회사의 ‘악행’에 그가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그가 남긴 서류에도 교묘히 증거가 없다. 이런 식이다. “편지 잘 받았음. 신중히 처리할 것을 권함.”

그가 1913년 설립한 록펠러재단의 헌장에 나오는 “널리 세계에서 인간의 안녕을 도모한다(promote the well-being of mankind throughout the world)”는 대목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연상시킨다. 자선사업이 본격화되자 돈 달라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기부를 요청하는 편지가 한 달에 5만 통이 배달된 시기도 있었다.
록펠러는 은퇴 후에도 끊임없이 송사에 시달려 증인으로 나서야 했다. 1890년대에는 결국 신경쇠약에 걸렸다. 탈모증 때문에 머리뿐만 아니라 눈썹까지 빠졌다. 그는 골프용, 교회용, 일반용으로 나눠 가발을 썼다.

록펠러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상석에 앉아 군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단 결정된 정책을 추진할 때는 무자비한 모습을 드러냈다.
34세를 넘기면서 록펠러는 점심 후 한두 시간 낮잠을 자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아랫사람들을 신뢰했다. 일을 맡기고 오후에 여가를 즐겼다. 록펠러는 60세에 처음 골프를 배웠다.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지만 골프에 중독됐다. 하루에 6시간씩 쳤다. 자전거를 탈 때는 손잡이를 잡지 않고 우산을 쓰는 기교를 부리기도 했다.

말년의 록펠러는 점점 더 대중적인 사람이 됐다. 대중도 그를 다시 봤다. 록펠러의 트레이드마크는 다임(dime·10센트 동전)을 꼬마들을 비롯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 근면·절약에 대해 간단히 ‘한 말씀’ 하고 난 다음에 말이다.

록펠러는 어려서 10만 달러를 모으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엄청나게 초과 달성을 했다. 90세가 넘자 100세까지 살겠다는 목표를 갖게 됐지만 좌절됐다. 자식들에게는 돈 관념 교육을 중시했다. 자식들이 자신의 재산 규모를 알 수 없게 했다. 용돈은 심부름·잔일을 해야 줬다. 파리 한 마리 잡으면 3센트, 음악 연습을 하면 한 시간에 5센트, 연필 깎으면 10센트를 줬다. 이런 교육 덕분인지 록펠러 가문은 번성했다. 그의 후손들은 미 부통령과 주지사를 지낸 손자 넬슨 록펠러(1908~1979)를 비롯해 정치·금융·자선 분야에서 제 몫을 하는 사람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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