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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의 봄’ 이끈 46세 대통령… 반년 뒤 독재 회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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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호 05면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촉발된 아랍 민주화 도미노 혁명이 이집트·리비아·예멘을 거쳐 시리아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시리아 반군(反軍)은 2일 “시리아 국토의 50% 이상을 통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의 최후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사진은 바샤르 알아사드가 2008년 7월 12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기자회견 도중 미소 짓고 있는 모습. [파리 로이터=연합뉴스]

시리아 사태의 중심에는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46) 대통령이 있다. 바샤르는 그의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Hafez al-Assad)가 2000년 숨진 후 거수기에 불과한 의회의 투표를 통해 대통령 자리를 대물림했다. 1971년부터 올해까지 2대(代)에 걸쳐 42년째 세습통치가 계속되고 있다.

7000명 희생 ‘시리아의 학살자’ 바샤르 알아사드

바샤르는 원래 아버지의 권좌를 물려받을 계획이 없었다. 1965년 9월 11일 둘째 아들로 태어난 바샤르는 성장하는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부모가 그의 삶에 거의 간여하지 않았다. 그는 안과의사가 꿈이었다. 다마스쿠스대에서 안과학을 전공하고 88년부터 92년까지 다마스쿠스 소재 티스린 군병원에서 안과학을 공부했다. 그런 후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도중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비보를 접했다. 94년 형 바실이 스피드카를 몰다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후계 수업을 받고 있던 형의 사망으로 바샤르는 부모의 호출을 받아 서둘러 귀국했다.

2002년 4월 26일 다마스쿠스에서 열린 한 박람회장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알아사드와 부인 아스마.

안과의사 꿈꾸다 형 사망으로 후계 수업
이후 바샤르의 후계 수업이 착착 진행됐다. 다마스쿠스 북부 홈스에 있는 군사아카데미에 들어가 군사학을 공부했고 고속 승진 끝에 99년 1월 육군 대령이 됐다.
서방세계의 물을 먹은 탓일까, 그의 아버지 통치 말기에 바샤르는 근대화와 인터넷을 옹호하는 등 아버지와는 다른 예비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부패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0년 6월 10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바샤르는 체제 옹호자들에 의해 대통령에 추대됐다. 아버지 알아사드를 곁에서 모셔온 그들은 당시 34살짜리 젊은 바샤르를 대통령에 앉히기 위해 헌법까지 수정했다. 바샤르는 육군원수와 군사령관, 그리고 집권 바트당의 사무총장 등 요직을 차례차례 접수했다. 2000년 7월 의회 투표에서 바샤르는 97%의 찬성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취임 연설은 파격적이었다. 바샤르가 광범위한 개혁을 약속한 것이다. 경제를 현대화하고 부패를 추방하며, 시리아식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한 건설적인 비판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 직후 수백 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독립 신문사 설립도 허용했다.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지식인 집단에 대중 정치집회와 그들의 주장을 담은 출판물을 발행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기도 했다. ‘다마스쿠스의 봄’이었다.

하지만 봄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1년 초 지식인 모임이 중지되기 시작했고, 주요 야당 인사들이 체포됐다. 언론 자유에 대한 제재도 가해졌다. 이후로는 비상통치 체제가 다시 발효됐다. 모든 게 ‘원위치’였다. 영장 없는 민간인 구금이 자행됐고, 그나마 남아 있던 몇몇 경제 자유화 조치는 소수 엘리트에게만 혜택을 주었다.

영국 BBC 방송은 정치 분석가들의 말을 인용, 바샤르 체제하에서의 개혁 조치가 그의 아버지에게 충성했던 ‘올드 멤버’에 의해 금지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들 올드 멤버뿐 아니라 바샤르의 가족도 바샤르로 하여금 야당 인사들을 탄압하도록 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화국 근위대장을 맡고 있는 남동생 마헤르(44), 누나 부시라(51)와 군 참모총장을 맡고 있는 부시라의 남편 아세프 쇼카트(61)가 그들이다.

2007년 바샤르는 역시 97%의 찬성으로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바샤르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대이스라엘 강경노선을 유지했다. 이스라엘이 점령지역을 완전히 돌려주지 않는 한 평화는 없다고 거듭 선언했다. 이란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3년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는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하면서 시리아는 이라크 무장세력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는데 이러한 행동이 워싱턴 정부의 분노를 자극했다.

지난해 연말 이후 시리아 정부군은 많은 지역에서 장악력을 상실했다. 정부군에서 이탈한 장교와 병사들이 결성한 ‘자유시리아군(FSA)’이 다마스쿠스 인근까지 진격해 정부군과 교전하며 바샤르 정권을 위협하고 있다. 정부군 이탈 병사는 지난해 12월 2만5000명에서 이달 초 현재 4만 명으로 늘었다고 자유시리아군은 주장한다. 두 달 사이 두 배 가까이로 규모가 커졌다는 것이다. 지난달 무스타파 아흐메드 알셰이크 육군 장군과 아페프 마흐무드 술레이마 공군 대령이 자유시리아군 가담을 선언하는 등 고위 장교들의 이탈도 이어지고 있다.

전향한 시리아 군인들은 비무장 시위대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유엔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이후에만 최소한 256명의 어린이가 숨졌다.
이에 대해 바샤르는 최근 A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시위대에 대해서는 강경 대응을 다짐하고 있다.

바샤르는 군에 반정부 시위대를 가혹하게 진압하거나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죽이거나 잔인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은 없었다. 나는 그들(군인)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나 개인의 병력이 아니다”고 변명했다. 바샤르는 또 “나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바샤르의 부인 아스마 알아사드(Asma al-Assad·36)도 이번 사태로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아스마는 그동안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아름답고 현대적인 영부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어디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우선 패션 잡지 ‘보그’가 2011년 봄 호에서 아스마에 대해 보도한 내용이 도마에 올랐다. 당시 잡지는 영국에서 태어난 아스마를 ‘사막의 장미’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그해 3월부터 시리아 전역에서 시위가 확산되며 끔찍한 인권유린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데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자 보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입장을 항변하다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삭제했다.

샤넬 매니어 아스마, 다이애나비 벤치마킹
지난해 10월 시리아 곳곳에서 시체가 쌓여갈 무렵 구호단체 요원들이 다마스쿠스에서 아스마를 만났다. 아스마가 직접 요청해 이뤄진 만남이었다. 당시 아스마는 구호단체 사람들에게 그들 활동의 위험성만 지적했다. 구호단체 요원들이 시리아 보안경찰과 군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에 대해 고발할 때 아스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했다고 한다.

아스마는 2년 전인 2009년만 해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해 3주간 폭격한 후 점령한 것을 놓고 “엄마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이러한 재앙이 멈추도록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시리아 전문가로서 아스마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미국인 학자이자 언론인 앤드루 태블러는 “지금 닫혀 있는 궁전 문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현재 아스마가 어느 정도 통제력을 갖고 있다거나 그의 남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집트 일간지 알마스리 알요움에 따르면 아스마는 지난달 29일 수도 다마스쿠스 공항을 통해 해외로 출국을 시도하다 반군에 발각돼 대통령궁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아스마는 75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시리아 이민자 출신의 심장병 전문의 파와즈 아크라스가 아버지, 런던 주재 시리아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사하르 오트리가 어머니다. 아스마는 아랍어로 ‘최고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런던의 중산층이 사는 지역에서 성장한 아스마는 킹스 칼리지에서 컴퓨터공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바이오공학과 제약 업종 인수합병 분야에서 3년 동안 일하기도 했다.

바샤르와는 90년대 런던에서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는 바샤르가 런던에서 안과학을 공부하고 있던 때였다. 두 사람의 결합에 대해 알아사드 가문은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바샤르는 시리아에서 엘리트 시아파 부족인 알라위트파 출신인 데 반해 아스마의 아버지는 수니파 무슬림이었기 때문이다. 두 파벌은 오랜 경쟁과 갈등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아스마는 고(故) 다이애나비를 모방하려 했던 것 같다. 유튜브 동영상에 노인과 병에 걸린 어린이들을 돌보는 장면과 나무를 심거나 남편 곁에 앉아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종종 등장했다. 아스마는 또 유행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샤넬 제품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부부는 하페즈·자인·카림 등 세 자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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