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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호남 사람 안 밀어, 대선에선 다 떨어진 꽃이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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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호 07면

3일 오후 광주광역시 중심가인 충장로 거리를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걷고 있다. 광주=프리랜서 오종찬

한파가 몰아친 지난 1일 오후 6시 광주광역시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서구 양동시장. 시장 모퉁이의 허름한 식당에서 막걸리와 꼬막 한 접시를 놓고 상인들의 정치 토론이 벌어졌다. 두 달 앞둔 총선이 아닌 연말 대선이 관심사였다.

제2 노무현 찾는 광주 민심 르포

“나는 철수여. 지금 세상이 정보기술(IT) 시대야. 사람도 깨끗하잖아. 경제를 업그레이드할 사람이 나와야지. 젊은 사람들도 좋아한다잖아.”(유종태ㆍ63)

“우리는 호남 사람은 안 찍어부러. 괜히 호남 출신 누구누구 떠드는데 다 떨어진 꽃이여. 전라도 사람을 (후보로) 내면 경상도서 너그들끼리 해먹는다고 안 찍는당께. 문재인은 부산 사람이여. 그래야 노무현처럼 전라도서 밀어주고 부산서도 표 줘서 되는 것 아닌가.”(이길수ㆍ71)

“학규도 괜찮아. 이젠 서울ㆍ경기가 중심이야. 여기는 DJ 이후론 인물이 없어. 경기도지사를 했으니 중앙 정치도 잘할 수 있지 않는당가.”(유종태)

2002년 3월 민주당의 대선 후보 지역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선택하며 ‘이인제 대세론’을 무너뜨리고 노풍을 만들었던 광주. 10년 후인 지난 1일 광주는 두 번째 노무현을 찾고 있었다.

양동시장을 휘도는 칼바람 속에 전기난로를 쬐고 있던 전재규(68ㆍ홍어 판매)씨는 “타지 출신이라고 우리가 못 찍을 이유가 있나. 이길 사람을 시켜야지”라고 했다. 건어물 가게를 지키던 고영선(54)씨는 “38선을 전라도는 지키고 경상도 출신은 안 지키냐”며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문재인 민주통합당 고문의 출신지를 따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안철수는 새 사람이니 좋은데 정치를 안 한 게 걸리고, 문재인은 먼저 고향에서 이기는 게 우선이제. 향토에서 이겨야 다른 데 가서도 이기지”라고 훈수도 했다. 감자를 깎던 김정자(58)씨는 “임금을 잘 만나야 백성이 편안하다”며 “좌우당간 우리는 민주당에서 미는 사람을 찍지 누구를 찍겠소”라고 말했다. 시장을 찾은 이상규(38ㆍ교사)씨는 “안 원장은 정치를 하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면 당내 문재인ㆍ손학규씨의 경쟁”이라고 전망했다.

다음 날인 2일 오전 광주 북구 전남대 학생회관. 젊은이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인물 찾기에 나섰다. 2002년 광주가 지역을 넘어선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10년 후 광주의 젊은 세대는 정당을 넘어선 새 인물 선택론이 엿보였다. 김석훈(26ㆍ경제학부)씨는 “젊은 세대에겐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잘한 게 없다. 안 원장 같은 분이 정치를 바꿨으면 좋겠다는 게 우리 생각”이라고 했다. 김종국(26ㆍ에너지자원공학)씨는 “한나라당에 비해 민주당에 상대적으로 더 관심을 가지는 정도일 뿐”이라며 “젊은 사람들은 지역도 당도 떠나 취업난을 해결할 인물을 더 기대한다”고 했다.

광주 민심은 민주통합당 지도부에 친노(親노무현) 진영이 대거 입성한 것을 놓고도 “정권을 바꾸려면 그 길밖에 없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장인균 광주시 정무특보는 “‘친노 장악’이라는 일부 주장은 ‘찻잔 속의 태풍’”이라며 “이보다는 대선 승리를 위한 절박감이 앞선다”고 말했다.

하지만 광주의 주자 찾기 깊숙이엔 속앓이가 숨어 있다. 2002년 노풍의 학습효과엔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이어졌던 경험 역시 있다. 1일 양동시장에서 만난 퇴직 공무원 김모(67)씨는 “노무현씨는 당을 안 만들었어야 했어. 그래서 버려버렸어”라고 했다. 윤장현(광주 아이안과 원장) 전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은 “광주가 노무현 대통령을 선택하며 지역 감정이라는 벽을 넘었지만 이번 대선은 물론 차차기 대선에서도 새 패러다임을 보여줄 호남 정치인이 뚜렷하지 않다”며 “지식인 사회에선 이를 놓고 자괴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광주가 밀 주자를 놓고 쏠림과 교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진 민주통합당 전남도당 사무처장은 “호남 주자군이 없으니 정서적으로 동일시하는 정도가 약하다”며 “호남 민심은 굉장히 유동적이다. 누가 뜬다고 하면 확 쏠리는 현상이 계속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분당을 선거 후엔 호남 지지율이 오르며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상승세를 탔고, ‘안철수 바람’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선 호남의 안 원장 지지율이 다른 지역보다 5∼10%포인트 더 높았다. 안 원장이 정치 참여를 주저하는 듯한 상황이 계속되며 불안감이 느껴지자 지난달 하순을 기점으로 호남에서도 문 고문 지지율이 급부상 중이다.

광주가 링의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허전함은 젊은 층의 정치권 불신과 결합되며 총선 물갈이론으로 번지고 있다. 강승주(37ㆍ직장인)씨는 “광주는 한번 갈아엎어져야 한다. 지역 표심에 편승해 날로 먹으려 했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광주일보 등의 여론조사에선 광주 지역구(총 8곳) 6곳에서 현역 의원과 예비 후보들이 접전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동구의 박주선 의원과 양형일 전 의원, 광산갑의 김동철 의원과 전갑길 전 의원은 전ㆍ현직 간 치열한 리턴 매치 중이다. 서구을에 뛰어든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도 선전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한 현직 의원의 선거 참모는 “지금 광주 총선에선 MB 심판론은 당연한 얘기로, 말해봐야 차별화가 안 된다”며 “당신이 여의도에서 광주의 큰 정치인으로 얼마나 능력을 보여줬는가를 물으니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광주에선 오히려 ‘현역 역(逆)프리미엄’ 현상까지 등장한다. 과거 현역들이 느지막이 후보 등록을 마쳤다면 이번엔 의원 8명 전원이 마감일(3월 23일)에 한참 앞서 이미 등록했다. 하루라도 빨리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선거법상 현역 의원도 등록 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선관위 등록 때 기입하는 경력에 현직 의원직을 가린 이도 3명이나 됐다. 박주선 의원은 ‘전 김대중 대통령 법무비서관’ 등으로 했고, 김영진 의원은 ‘전 노무현 참여정부 농림부 장관’으로 기재했다. 장병완 의원도 ‘전 노무현 정부 기획예산처 장관’ 등으로 표기했다. 광주5ㆍ18연구소 오승용 연구교수는 “광주의 물갈이 여론엔 ‘대선 후보는 물론 서울시장 보선 때의 후보군과 나꼼수 인사들까지 다 영남 출신이더라. 광주가 정치인을 키우는 데 실패했다. 이제라도 새 인물로 바꿔 만들자’는 정서가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통합진보당과의 선거연대도 민주당 후보들에게 유리하게 민심이 흐를지는 미지수다. 직장인 최모(45)씨는 “총선은 대선과 다르다”며 “대선 때 표 결집을 위해 광주에서도 한 곳 정도는 통합진보당에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조정관(정치학) 전남대 교수는 “공천에서 감동을 주지 못하면 무소속 등 비(非)민주당 인사가 당선될 가능성도 있다”며 “그래야 민주당 의원들이 정신 차린다는 심리가 잠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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