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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빼앗긴 적 있으면 손 들라” 식 공개조사부터 바꿔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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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에 대한 얘기가 연일 끊이지 않는다. 교육과학기술부, 시·도교육청, 경찰 등이 나서 연일 학교폭력 근절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학생들의 얘기를 먼저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문을 던진다. 이를 위해 청소년들이 지난달 17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서울시립 청소년미디어센터에 모였다. 학교폭력의 심각성과 문제점을 짚어보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청소년 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패널은 고교 1, 2학년에 재학 중인 6명의 학생. 그중엔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학생 2명도 포함돼 있었다.

최석호·김슬기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메신저·문자 사용하는 등 학교폭력 ‘지능화’

학생들은 “학교폭력 방법이 다양화·지능화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학교폭력이 왕따로 이어지고, 전교생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일명 ‘전따’로까지 이어진다는 것. 최근에는 학교폭력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휴대전화와 인터넷 메신저로 금품을 요구하는 등의 지능화된 방식까지 동원되면서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보복이 두려워 교사나 부모에게 피해상황을 알리는 것을 꺼리면서 한 번 발생한 학교폭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친구들마저 피해자를 돕고 싶어도 ‘나에게 피해를 주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방관자가 된다.

■유상우(경기 상원고 1)군=고교에 진학한 뒤 한 학기 넘게 학교폭력을 당했다. 체육시간에 야구경기를 하면서 여학생 한 명과 우연치 않게 신체접촉을 했는데, 그 학생이 “변태”라고 놀리기 시작했고, 소문이 퍼지면서 ‘성추행범’으로 낙인찍혔다. 가해자들은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내 필통을 화장실 변기에 빠뜨리기도 했다. 전교생이 나의 존재를 무시했고, 학기초 97점이었던 국어점수가 2학기엔 70점대로 떨어지는 등 성적도 급락했다.

■박상요(서울 보성고 2)군=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학교폭력에 대한 소통을 하는데, 요즘엔 가해자들의 폭력방식도 지능적이 돼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중학생이 휴대전화 문자나 인터넷 메신저로 ‘부하’ 격인 초등 6학년 학생에게 “친구들에게 돈을 빼앗아 일정 금액을 구해오라”고 요구한다. 지시를 받은 학생은 자신이 괴롭히는 또 다른 학생에게 같은 방법으로 금품을 빼앗는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메시지를 활용하는 건 증거인멸을 위해서다. 이 때문에 경찰수사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들었다.

학교폭력 문제의 심각성과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청소년 토론회’에 참석한 박상요·이유림·유서형·조영우·양준영·유상우 학생(왼쪽부터). [김진원 기자]

신고하고 싶어도 신고할 수 없는 현실

■이유림(상명사대부여고 1)양=피해자는 물론 피해자의 친구조차 교사에게 신고하지 못한다는 게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키우는 주 원인이다. 보복이 두려워서다. 실제 중학교 때 한 학생이 따돌림을 당하자 몇몇 친구가 도와주려고 교사에게 신고를 했다. 그러나 교사는 가해학생들에게 단순히 ‘괴롭히지 말라’는 훈계를 했고, 이후 피해자나 신고를 한 피해자 친구들을 향한 가해학생들의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조영우(분당 늘푸른고 2)군=학교폭력 신고를 받은 교사들의 미온적 대처도 문제다. 학교 자체적으로 2개월에 한 차례 정도 학교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하는데, 한 학생이 자신의 피해내용을 적어냈다. 이후 담임교사가 그를 교무실로 불렀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이 앉아 있었다. 대질조사를 위해서였단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용기를 내 피해실태를 적었지만, 돌아오는 건 보복뿐이었다.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교사의 태도가 화(禍)를 키운 셈이다.

조군은 “학교폭력으로 인한 각종 사건이 터지자 교육과학기술부가 연 2회에 걸쳐 학교폭력 실태조사를 하겠다고 하는데, 실태조사는 예전부터 이미 있었다”고 말했다. “역으로 실태조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면 학교폭력 문제가 이처럼 심각해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교과부가 발표한 학교폭력 근절대책을 들은 뒤 지난해 12월 29일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으라’는 취지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유상우=실태조사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조사지를 보면 ‘1. 금품갈취를 당한 적이 있는가’ ‘2. 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가’의 질문에 예, 아니오로 적게 돼 있다. 보통 1교시 시작 전 5분에 걸쳐 실태조사를 하는데, 시간이 없다 보니 조사지를 작성한 직후 교사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한다. “1번 질문에 ‘예’라고 답한 사람 손 드세요” 식이다. 공개조사와 다름없는데, 어떤 피해자가 솔직하게 답할 수 있겠나.

제대로 된 학교폭력 예방교육 진행 시급

상당수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미디어교육을 진행 중이다 학생끼리 고민을 공유하고, 상담해주는 또래상담제가 운영되고, 학교마다 학교폭력 상담교사가 배치됐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 같은 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중학생 시절 학교폭력 피해자 경험이 있다는 유서형(경기 안곡고 2)양은 “실제 학교폭력 가해자였던 학급반장이 또래상담사로 활동했다”며 “현재 다니고 있는 고교에도 상담실은 있지만, 전문상담교사가 언제 상담실에 있는지 아는 학생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양준영(서울 성신여고 2)양=한 학기에 한 차례꼴로 학교폭력 예방 미디어교육을 실시한다. 영상물을 통해 학교폭력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개선방안을 살펴보라는 의도다. 그러나 요즘 지능화된 학교폭력 내용을 담지 못하고 옛날 사건을 다룬 영상물이 대부분이어서 청소년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학생들이 심각성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해 청소년 스스로 문제점을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급선무다.

■이유림=학교폭력의 심각성이 더해지는 것은 폭력 일색의 게임과 영상매체가 보편화되고 있는데도 그 이유가 있다. 학생들은 게임 캐릭터를 자신이라고 착각해 누군가를 때리고 사물을 부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영화에서 나오는 폭력과 욕설을 따라 하면서 ‘우월한 위치에 올랐다’고 착각한다. 청소년은 유해환경에서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정부 차원에서 청소년들이 폭력성 있는 게임이나 영화를 접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

■박상요=정부가 내세운 학교폭력 근절대책 중 하나는 ‘3월부터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폭력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초·중학교에서 학교폭력을 저지른 학생은 5년 동안, 고등학생은 10년 동안 가해기록을 보존한다는 내용이다. 가해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반드시 시행돼야 한다. 하지만 제재만으로 학교폭력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해학생들에 대한 인성교육을 제도화해야 한다.

■유서형=학교 차원에서 교사·학생 간 상담시간을 늘리고, 상담 전문교사를 상주시켜 학교폭력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교사들이 제대로 된 상담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전문적인 연수 프로그램이 진행돼야 하며, 교사·학생 간 상담결과는 부모에게 전달돼야 한다. 이를 통해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녀와의 얘기시간을 늘리면서 자녀 스스로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지면 가해자 양산을 줄이는 데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편 이날 열린 토론회를 촬영한 동영상은 청소년 미디어방송국 ‘스스로넷(www.ssro.net)’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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