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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커피점에 자리내준 제빵 명장 "죽을때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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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제과제빵 명장 권상범씨가 폐점을 하루 앞둔 30일 서울 동교동 ‘리치몬드 과자점’에서 제빵사 옷을 입고 매장에 빵을 진열하고 있다. 이곳은 그가 1983년부터 30년째 운영해온 곳이다. 제과부문명장의 영예도, 제과기술학원 설립도 모두 이곳을 터전으로 이뤄냈다. 권씨는 사진 촬영 도중 내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태성 기자]

30년간 서울 홍익대 앞을 지켜온 ‘리치몬드 과자점’이 31일자로 문을 닫는다. 슈크림과 팥빙수로 유명하며 대한민국에 8명뿐인 제과제빵 명장 권상범(67) 파티시에가 운영하는 곳이다. 건물주가 최근 가게를 비워달라고 했다. 롯데그룹 계열사 앤제리너스 커피가 직영점을 내기로 이미 계약했다. 30일 권 명장은 제빵사 복장을 입고 홍대점 손님들에게 고별 인사를 했다. 일생 ‘빵 공부’를 한다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구나.’

 앙꼬빵 한 조각이 입 안에서 녹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나이 열다섯,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다. 경북 의성에서 외삼촌이 빵가마 하나 들여놓고 하던 작은 다과점 주방에서였다. 나는 1945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나와 두 여동생을 키우셨다. 고픈 배를 안고 풀뿌리를 씹으며 다짐했다. 기술을 배워 자식이 태어나면 가난이 아닌 기술을 물려주겠노라고.

 처음 맛본 빵은 ‘구원’이었다. 여기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어차피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도 못됐다. 의성과 대구의 제과점에서 기술을 배우다 64년 19세 때 단돈 2000원을 들고 홀로 상경했다. 온갖 구박을 받아가며 기술을 배웠고, 스무 살에 풍년제과에 취직했다. 오븐 곁에서 하루 3~4시간 칼잠을 자며 빵만 연구한 끝에 27세에 나폴레옹 과자점 공장장이 됐다.

리치몬드 과자점의 외부 모습. [김태성 기자]

 83년 ‘리치몬드 과자점 홍대점’이 탄생했다. 상호는 스위스의 제과기술학원 이름에서 따왔다. 지하철 홍대역이 개통되기도 전의 일이다. 30년간 나의 터전이었던 동교동 162-16번지. 제과부문 명장, 한국 최초의 프랑스요리아카데미 자문위원 …. 모두 이곳을 통해 온 복이다. ‘리치몬드 제과기술학원’ 설립의 기쁨도 잊을 수 없다. 제빵 기술을 어깨 너머로 너무 힘들게 배워서 내 기술은 후배들에게 다 공개하려고 차린 학원이다. 지금까지 400명이 넘는 제빵기술자를 배출했다.

 ‘그래. 수도꼭지를 여기에 놔달라고 말했었지.’ 오늘 아침 가게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눈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는 건물을 지을 때부터 땅 주인과 함께했다.

 지난해 4월 건물주로부터 ‘내용증명’이 왔다. 1월 31일로 계약이 완료되니 가게를 비우라는 통보였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5년 전 재계약 때도 프랜차이즈 대기업의 빵집에 자리를 내줄 뻔한 걸 보증금과 월세를 두 배씩 올려주고 지켜냈다. 손이 떨렸지만 제빵인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힘에 부쳐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다쳐 한동안 아팠다. 신장과 장에 탈이 나 병원 중환자실 신세도 졌다. 하지만 리치몬드 성산·ECC점과 제과학원을 생각하며 다시 힘내기로 했다. 홍대점 폐점을 안타까워하는 성원도 위로가 됐다. 리치몬드에서 선 봐서 결혼했다는 부부, 학생 때 먹은 리치몬드 빵을 결혼 후 임신해서 챙겨 먹었다는 여성 고객…. 뻥 뚫렸던 가슴이 조금씩 채워졌다.

 백화점 입점, 프랜차이즈 사업 제안을 숱하게 거절해 왔다. “빵 만드는 노동자가 되면 안 된다”는 신조 때문이다. 남이 정한 품목을 남이 시키는 대로 만들면 미래가 없다. ‘아픈 빵’ 골라내고 품질 책임지는 일도 못하게 된다. 입버릇처럼 말한다.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해.” 나는 빵 만드는 사람이고, 이것은 하늘이 주신 직업이다. 이 한 가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었고, 가르쳐왔다. 내 죽을 때까지 할 거다. 리치몬드는 살아남아야 한다.

심서현 기자

리치몬드 과자점 역사

1983년 리치몬드 홍대점 개점

1993년 리치몬드 제과기술학원 개원

1994년 리치몬드 성산점 개점

2002년 권상범 파티시에 ‘제과부문 명장’ 선정

2012년 홍대점 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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