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낯 뜨거운 욕설 문화

중앙선데이

입력 2012.01.29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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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방송’이라는 한국방송공사(KBS)에서 낯 뜨거운 법정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KBS 노조가 노보(勞報)에 2011년을 압축하는 사자성어로 ‘시벌로마(施罰勞馬)’를 실은 데 대해 KBS 경영진이 모욕죄 혐의로 노조 간부들을 고소한 것이다.

‘시벌로마’. 참 묘한 단어다. 한자로는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벌을 내린다’는 뜻이란다. 하지만 우리말 발음으로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다. 노조 측은 “지난해 방영된 KBS 드라마 ‘영광의 재인’에서 나온 대사”라며 어디까지나 풍자와 해학임을 강조한다. ‘영광의 재인’에 나왔던 후렴구 ‘족가지마(足家之馬·족씨 집안의 말)’를 붙여 놓으면 더 끔찍하다. 삼류 시정잡배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육두문자다. 한자문화권의 어떤 학자도 해독 불가능할 것이다.

KBS 노사의 유치한 언어유희를 지켜보면서 ‘방랑시인 김삿갓’이 떠오른다. 남루한 행색의 김삿갓이 어느 서당에 들렀다가 버릇없는 학동들의 놀림을 받고서 썼다는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이라는 시 한 편이 생각나서다. 한자의 뜻(訓)과 한글의 소리(音)를 절묘하게 뒤섞어 놓아 읽는 이들의 실소를 머금게 한다. 19세기 중반을 풍미한 김삿갓은 KBS 노조의 ‘욕설 노보’를 어떻게 볼까. 한바탕 껄껄 웃으며 노사 양측의 뒤통수를 때릴 풍자시를 짓지 않았을까 싶다.

국적 불명의 욕설 문화는 더 이상 낯선 현상이 아니다.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확산을 타고 전국적으로 ‘욕설 경연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법복을 입는 근엄한 표정의 현직 판사들까지 트위터에 ‘가카새끼 짬뽕’(이정렬 부장판사), ‘가카의 빅엿’(서기호 판사)이라는 글을 싣는 판이니 말이다. 중·고교 교실을 점령한 ‘씨바’ 욕설이 공론장(public sphere)에까지 넘쳐흐른다. KBS 노사의 사례는 우리말이 어디까지 추락하고 멍들고 있는지 단적으로 말해 줄 뿐이다. 10대 경제대국을 지향한다는 대한민국 사회의 속살을 드러내는 것 같아 민망하다.

우리 역사에는 풍자·해학의 대가들이 많았다. 신재효가 집대성한 판소리 여섯 마당에선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민초들의 한(恨)과 애환이 민중예술로 승화돼 표출된다. 박지원의 허생전,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를 읽을 때 남모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건 통렬한 풍자와 절제된 표현이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한 나라의 품격을 압축해 보여 준다. 조선의 양반에겐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겠다는 결기쯤은 있었다. KBS 노사는 그런 고민을 해 봤을까.

중국이나 일본을 살펴봐도 막말과 욕설은 동양의 유교문화 전통과 거리가 멀다. 일본어에서 ‘바가야로(馬鹿野<90CE>·말과 사슴, 멍텅구리라는 뜻)’는 상대를 비하할 때 쓰는 마지막 레드 라인(red line)이다. 중국어에서도 ‘반진(半斤·한 근이 못 되는 모자란 사람)’ 또는 ‘량바이우(500g 한 근의 절반)’가 고작이다. 1990년대 말 베이징 밤거리에서 승차 거부를 하는 택시기사를 향해 ‘반진’이라고 욕했다가 맞아 죽을 뻔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에선 요즘 ‘공유·참여·개방’을 모토로 한 소셜미디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서울대 장덕진 교수는 10년 후 세상이란 책에서 “2012년 치러질 총선과 대선은 사상 최초, 사상 최대의 소셜 선거로 치러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편가르기와 타인에 대한 욕설·비방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내가 하면 풍자, 남이 하면 비방’이라는 삐뚤어진 의식이 횡행한다. 오늘도 트위터 세상에선 누워서 침 뱉기의 자기고백이 무성하다. 누구라고 일일이 손꼽기 힘들 정도다.

4·11 총선이 8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예비후보자만 1600명에 이른다. 앞으로 이들이 쏟아낼 언어폭력과 ‘막말 행진곡’이 어디까지 치달을지 걱정스럽다. 분노의 시대라는 2012년, 윈스턴 처칠 같은 이는 아닐망정 한국식 풍자의 진수를 보여 줄 정치인이 출현하는 건 아직 요원할까. 이젠 우리 사회도 상대방을 죽이는 사통(死通)이 아니라 모두를 살리는 활통(活通)의 대가가 나와야 할 때다. ‘튀어야 산다’는 잘못된 의식을 바로잡을 책임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에게 있다.

중앙SUNDAY 편집국장 대리 yas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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