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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가 왜장과 영혼 결혼을? 잘못된 설명 여전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전북 장수군 의암사에 봉안된 논개 영정 사진.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논개`를 폐기한 후 2008년 충남대 회화과 윤여환 교수가 당시 여성들의 얼굴과 복식을 고증해 제작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 한국계 변호사는 이달 초 경남 진주로 여행했다가 깜짝 놀랐다. 동반한 여행 가이드가 “논개가 왜장과 영혼 결혼했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애국 충절의 상징인 논개에 대한 가이드의 이상한 설명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이런 사연을 지난 21일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렸다.

과거 논개의 영정과 묘비는 일본에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무덤이 있는 일본 후쿠오카현 히코산 기슭에 있는 사당 ‘보수원’에 1976년부터 25년 동안 있었다. 일본에 있던 영정과 묘비는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군 군민들의 항의로 2000년 장수군 논개 사당으로 옮겨졌다.

히코산 보수원을 조성한 사람은 건축가였던 우에스카 하쿠유다. 그는 히코산 기슭에 있던 자신의 땅에서 게야무라의 묘비 조각을 발견했다.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극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사무라이였던 게야무라의 비극적 인생을 흠모하던 그는 논개와 게야무라를 ‘영혼 결혼’시켜 부부로 만든다는 발상을 하게 됐다.

논개가 일본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투신했다고 전해지는 경남 진주 남강의 의암. 의암 근처 남강 다리 아래에는 논개가 투신할 때 손에 끼고 있던 10쌍의 쌍가락지가 장식되어 있다.

우에스카는 1975년 한국으로 건너와 논개의 넋을 일본으로 모셔갔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웠다. 우에스카는 진주 남강에 국화와 천마리의 종이학을 띄워보내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지는 초혼의식을 치렀다.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에서 화강암을 구입해 ‘주논개지묘(朱論介之墓)’라는 글씨를 새겨 비석으로 썼고, 진주의 한 한국화가에게 부탁해 친일화가 김은호의 `논개`를 모사한 그림을 가져가 영정으로 썼다. 한국인도 논개를 일본에 모시는 과정을 도왔다. 당시 주일 후쿠오카 총영사가 논개묘 비문을 썼다. 매해 보수원에서 진행된 한·일 합동진혼제에는 후쿠오카 부영사를 포함한 한국 인사들이 참석했고, 진주시장도 화환을 보냈다.

그 후 논개의 영정과 묘비는 게야무라의 무덤 옆에 게야무라의 아내·처제와 함께 모셔졌다. 일본에서 논개는 게야무라의 첩 취급을 당했다. 논개 영정 등이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에서는 ‘논개 묘비 앞에서 빌면 아이를 잘 낳는다’거나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일본 장수를 잊지 못한 논개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게야무라와 해로했다`는 설도 있었다. 2000년 논개의 영정을 옮겨올 당시 장수군 관계자는 “우에스카가 논개 영정을 게야무라 무덤 옆에 걸어놓고 게야무라와 은밀히 영혼 결혼을 시켰다”고 말했다.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 게야무라를 진주 남강으로 유인해 끌어안고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시인 한용운·변영로 등이 일제 강점기에 논개의 넋을 기리는 시를 썼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논개의 행적이 전쟁 중이던 장수 게야무라의 사랑이야기로 포장되어 전해지기도 한다.

논개와 왜장의 영혼 결혼설을 언급했던 여행사 관계자는 “논개에 관한 예전 기사들과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관광객들에게 전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류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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