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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김정은의 허장성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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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기범
통일연구원 초청연구위원

세습 권력은 정통성의 기반이 선대(先代)에 있기 때문에 권력을 넘겨받는 쪽은 가급적 전임자와 동일시하려 한다. 지난달 김정일 사망 후 북한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라는 선전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김정은은 2010년 9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추대되면서 헤어스타일과 인민복 등을 통해 할아버지 김일성을 흉내냈다. 그의 통치행태 역시 김정일보다는 김일성을 모방할 것 같다. 김정일처럼 당·정·군에 배치한 측근들을 활용해 막후 통치를 하기보다는 김일성처럼 당 정치국 등 공식 정책결정기구를 활용해 전면에 나서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호하는 정책 영역은 김정일 방식에 가까운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은 말년의 김일성처럼 경제나 대화·협상을 통한 대남관리보다 선군(先軍)을 강조하면서 공갈·위협 방식의 대남정책부터 익히고 있다.

 김정은이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한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의 조문 태도에 시비를 건 것이다. 최고사령관 취임을 통해 군통수권의 공백을 서둘러 메우려 했고, 새해 첫날에 탱크사단을 방문해 김정일의 선군통치를 답습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이 조문을 빌미로 대남 비난에 나선 것은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 분야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있는 걸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 다른 목적은 북한 내부 결속용이다. 후계자의 권력기반이 취약하고 사회 불안 가능성이 증대된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대남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최고지도자의 사망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대남 접근을 최소화할 수 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때 북한은 ‘부상당한 동물’처럼 웅크렸다. 이제 막 ‘영도자’로 등극한 김정은으로서도 내부적으로 처리할 일이 산적해 있다. 적어도 김정일 칠순(2·16)까지는 ‘추모’ 분위기를 유지시키면서 부하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확보해야 한다.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 분별해 요소요소에 측근을 배치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김일성 생일 100돌(4·15) 때쯤 되면 ‘경제강국 진입’의 징표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빈번한 추모 혹은 경축행사, 일정한 증산을 위해 대규모 군중 동원도 불가피하다. 북한은 올해 내부문제에 치중할 수밖에 없어 일정 기간 남북관계의 소강상태는 불가피해 보인다.

 이런 수세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대남 도발 가능성을 방심할 수는 없다. 최고사령관에 오른 김정은이 군사적 리더십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이 작동할 수 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이 있다는 점에서 북한이 다양한 형태로 우리 선거정국에 개입할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김정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그가 젊다는 점에서 사고체계가 완성됐다기보다는 리더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과거 북한 지도자들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결단’도 가능할 수 있다. 북한의 구태의연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북쪽을 향해 ‘기회의 창’을 열어두겠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한기범 통일연구원 초청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