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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멸종동물로 만드는 디지털 직접민주주의 시대 … ‘이디오테스’는 되지 말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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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가관이다. 여당 의원들이 제 당명을 부끄러워하고 로고 내세우길 꺼린다. 야당 의원들은 대선 후보도 아닌 당 대표를 뽑으면서 비당원들의 눈치를 더 본다. 안쓰럽지만 대한민국 의회정치의 현주소가 그렇다. 개명을 하고 성분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기엔 기운이 이미 너무 쇠했다.

 대의정치의 쇠퇴가 이 땅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니다. 미국 역시 끝 모르는 정쟁에 국민 관심이 의회를 떠난 지 오래고, 프랑스 국민은 ‘최선’ 아닌 ‘차악(次惡)’ 논쟁을 벌이는 의회 지도자들에게 고개를 흔든다. 러시아에선 의원선거에 대한 불신이 ‘막강 푸틴’에 대한 공포마저 지워 가고 있다.

 새로울 것도 없다. 대의민주주의의 종언은 이미 20~30년 전부터 예견돼 오던 것이다. 2020년대에는 국회의원이 멸종동물로 분류될 거라 점치는 미래학자들도 적잖다. 그럼, 대안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 당연히 직접민주주의의 화려한 부활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사실 산업사회의 총아였다. 국민의 이름으로 기득권 부르주아 계층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대변했다. 그래도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는 데 그만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정보사회는 다르다. 문제가 발생하자마자 순식간에 전국적 이슈가 되고 바로 집단행동이 가능하다. 대의민주주의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일 뿐이다. 주인 뜻 거스르는 대리인들을 뭐 하러 비싼 돈 줘가며 고용한단 말인가. 여야 막론 관행이라던 ‘전대(錢大)’ 돈봉투는 결국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거란 말인가.

 인터넷과 모바일로 무장한 ‘현명한 군중(smart mob)’은 이제 대리인들을 해고하고 직접 나서고자 한다. 과연 대중이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직접민주주의를 상상한 건 아니겠지만 아이젠하워는 반세기 전에 이미 답을 하고 있다. “시민 대부분은 문제를 해결할 지식과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위기에 처했을 때 시민 다수가 내리는 결정이 대체로 정확하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 민주주의다. 설령 결정이 잘못되었더라도 대다수가 길을 바로잡는 방법은 남아 있다.”

 인터넷 광장에서 벌어지는 의견 개진과 정보 공유, 소통 과정에서 벌어지는 부작용에 대한 자정능력은 이를 증명한다. 나꼼수와 진중권의 논쟁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치 기술의 도약이다.

 우려가 없는 건 아니다. 아테네 민주정치의 전성기였던 페리클레스 시대에도 문제는 있었다. 당시 자유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을 ‘이디오테스(idiotes)’라 불렀다. 바보(idiot)란 뜻이 거기서 나왔다. 디지털 직접민주주의 시대의 이디오테스는 누굴 지칭하는 말이 될까. 사실 확인에는 관심도 없이 입맛에 맞는 선동가들의 주장을 무작정 퍼 나르는 ‘무뇌아’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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