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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에 밥 말아 먹듯 한‘식칼론’의 저항시인,사망 예언 이틀 전 타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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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호 33면

1999년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절의 조태일. [사진 중앙포토]

조태일(1941~99) 시인의 등단 초기 작품 가운데 ‘간추린 일기’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 시에는 ‘내가 죽는 날은 99년 9월 9일 이전’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신기하게도 조태일은 자신이 ‘예언’한 날짜를 이틀 앞둔 99년 9월 7일 간암으로 타계했다. “소주에 밥을 말아 먹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술을 즐겼지만 기골이 장대한 데다 나름대로 건강을 유지하던 그였다.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막연하게나마 예감한다지만 조태일의 경우는 99%쯤 정확했던 셈이다.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소년 같은 수줍은 미소로 얼버무렸다. 한데 58년에 이르는 길지 않은 그의 생애를 되짚어 보면 여러 군데에서 예사롭지 않은 흔적들과 마주치게 된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1> 詩에 자기 사망일 밝힌 조태일

‘구산(九山)의 하나인 동리산(桐裡山) 속/ 태안사(泰安寺)의 중으로/ 서른다섯 나이에 열일곱 나이 처녀를 얻어’(시 ‘원달리의 아버지’ 중에서)라는 시의 한 대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조태일은 전남 곡성 태안사의 대처승이던 아버지 슬하의 일곱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각별하게 생각했던 듯 다른 형제들은 ‘기(基)’자의 돌림자를 썼지만 유독 그에게는 태안사의 ‘태’자를 붙여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조태일이 85년 쓴 ‘자전적 시론’을 보면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아버지 또한 자신을 “태일아”라고 부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면서 세상을 떠났으므로 함께 산 세월은 10년 남짓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였다”고 적고 있다.

조태일의 가족은 48년 여순반란사건 때 태안사에서 쫓겨나와 광주에서 살게 된다. 아버지 사망 후 그는 어머니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인다. 어려운 서울살이 속에서도 20여 년 동안 어머니의 은행 통장에 매달 꼬박꼬박 용돈을 부쳐드렸다. 이 습관은 어머니 사후에도 5년간 계속돼 나중에 적잖은 돈이 쌓이게 되었다고 한다. 70년대까지도 ‘식칼론’ ‘국토’ 등 현실 비판의식이 강한 시들을 쏟아내던 그가 80년대 접어들며 서정적인 세계로의 변모를 보인 계기는 ‘어머니’와 ‘동심’을 매개로 한 ‘자연과의 교감’이었다.
심성과 인품이 남에게 호감을 주는 덕이기도 했지만 문단과의 인연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전남고를 거쳐 어렵게 경희대 국문과에 진학했으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던 그를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들은 문인 교수들이었다. 김광섭은 대학 내 문학상 심사에서 번번이 조태일의 작품에 최고 점수를 주어 여러 차례 등록금을 면제받게 해주었다. 조병화는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휴학해야 했던 그를 총장실로 데려가 특별 장학금을 받게 해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조태일은 대학 4년을 ‘공짜’로 다닐 수 있었다.

등단 과정을 보면 좀 더 극적인 데가 있다. 대학 3학년이던 64년 시 ‘아침 선박’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다. 하지만 심사 과정에서 이 작품은 예심조차 통과하지 못한 채 버려져 있었다. 심사위원이던 조지훈과 신동문이 본심에 오른 작품을 놓고 심사한 결과 당선작으로 낼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심사를 끝냈다. 그때 신동문이 “기왕이면 당선작을 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면서 예심 낙선 작품들을 싸들고 집으로 갔다. 조태일의 ‘아침 선박’은 어렵지 않게 신동문의 눈에 들어왔다. 응모 작품 중 가장 큰 원고지였기 때문이다. 신동문은 무릎을 쳤다. 이튿날 조지훈도 찬성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조태일이 자신의 작품에서 현실 비판의 색깔과 저항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은 70년 ‘식칼론’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 무렵 그는 시 전문지 ‘시인’을 창간해 주간이 되면서 김지하, 김준태, 양성우 등 저항 시인들을 발굴해 시인으로서 자신이 갈 길을 암시하고 있었다. 74년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 그로서는 고난의 출발점이었다. 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된 그의 연작시집 ‘국토’는 유신정권에 의해 곧바로 판매금지 조치됐다. 77년에는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 출판 사건에 연루돼 고은과 함께 구속됐다가 재판을 받고 풀려났으며, 80년에는 ‘자실’의 임시총회와 관련한 계엄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조태일의 시 세계는 서정시 쪽으로 크게 선회하고 있었으나 반체제 문학운동은 여전했다. 87년 ‘자실’의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출범하면서 초대 상임이사 직을 맡기도 했다. 그 무렵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던지 모교인 경희대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조교수에 임용된 조태일은 곧바로 예술대학장으로 승진해 편안한 말년을 맞았다. 95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99년 ‘무등 둥둥’이라는 제목의 창작 오페라 대본을 쓰는가 하면 마지막 시집이 된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를 펴내는 등 왕성한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그 무렵 간암 판정을 받고 요양원에 들어간 얼마 뒤 숨을 거두었다. 그가 태어난 태안사 입구에는 ‘조태일 시문학관’이 건립돼 있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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