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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수많은 ‘나’의 편집 결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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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호 25면

“1962년생으로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학교의 전임강사로 초빙돼 강의와 더불어 발달심리학, 문화심리학과 관련된 여러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때 문화심리학의 세계적 석학들과 함께 문화심리학(Kultur in der Psychologie)이라는 책을 책임 집필하기도 했다. 현재 명지대 여가문화연구센터 소장으로 여가산업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동아일보·중앙일보 등의 칼럼 기고를 비롯해 각종 언론매체와 방송에서 휴테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⑨ 자신에 관한 텍스트

2003년 내가 처음 낸 휴테크 성공학이란 책에 소개된 내 이력이다. 대부분의 대학교수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이력을 폼 나 보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세계적 석학’은 뭐고, ‘다양한 프로젝트’ ‘각종 언론매체와 방송’은 또 뭔가.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책은 2만 부 정도 팔렸다. 책 내용도 별로 재미없어 일찌감치 나 스스로 절판시켰다. 이 촌스러운 저자 소개의 글과 2009년에 출간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의 저자 소개를 비교해보자.

“1962년 서울 태생으로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심리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는 명지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니, 이런 거창한 프로필 따위는 다 잊어도 좋다. ‘김정운’은 팔뚝 굵은 아내가 차려준 아침 밥상에 감사하며, 아침마다 그날 가지고 나갈 만년필 고르기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고, 거리의 망사 스타킹을 보면 가슴이 뛰어 낚시가게 그물만 봐도 흥분하고, 자동차 운전석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목 놓아 따라 부르며 주책없이 울기를 좋아하는 사십 끝줄의 대한민국 남자다. 귀가 얇다 못해 바람만 불어도 귓바퀴가 귓구멍을 덮을 정도고, 한번 폭발하면 대로변에서 삿대질도 일삼는 욱하는 성격이지만, 한번 마음에 담아두면 며칠 밤 잠 못 자며 고민하는 소심남이기도 하다.”

2003년에 작성된 김정운의 이력에서는 한국 심리학계에서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처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2009년의 김정운은 자신의 기본적 이력만 간략히 소개하고 나머지는 내면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회통념상 엄숙해야 하는 ‘대학교수’이지만, 수컷으로서는 여타 중년사내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원초적인 수컷으로서의 이야기는 2003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지금까지 30만 부가 넘게 팔리고 있다. 자, 그럼 ‘2003년의 김정운’과 ‘2009년의 김정운’은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

나 자신의 이야기는 항상 일리(一理) 있다
내러티브 심리학(narrative psychology)은 바로 ‘자신에 관한 텍스트가 바로 자기 실체’라는 정의에서 출발한다. 자신에 관한 텍스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 즉 기억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나는 과거 기억의 편집이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그 기억이란 항상 자의적이고 편파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나는 지금까지 50년을 살았다.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곤 항상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중요한 순간만 기억한다. 그 중요한 순간조차 지극히 주관적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만 기억한다. 또한 ‘내가 기억하는 나’의 구체적 내용은 상황에 따라 매번 달리 편집된다. 예를 들어 여인들 앞에서는 내가 청년시절 얼마나 터프하고, 사내다웠는가에 관해 침이 튀도록 이야기한다. 주로 학창 시절 싸우다가 정학당한 이야기, 데모하다 제적당한 이야기, 군대 시절 특공무술 이야기 등등이다(모든 사내의 이야기는 다 똑같다. 그러나 착한 여인들은 이미 수십 번 들어 달달 외우고 있는 내용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놀란 표정, 겁먹은 표정으로 들어준다. 복 있을진저! 그때의 고마운 여인들이여).

학회의 뒤풀이 자리나 교수회의 끝에 이어지는 식사자리에서 이야기할 때는 전혀 다른 내가 새롭게 편집된다. 학창 시절부터 내가 얼마나 창의적으로 사고했는가를 가능한 한 다양한 사례를 들어 이야기한다. 내가 유학한 독일에서의 공부가 얼마나 ‘빡셌는가(!)’를 온갖 ‘겸양의 표현’을 써가며 설명한다. 그러나 한 꺼풀 뒤집어보면 다 내 자랑이다.

‘터프한 나’와 ‘학구적인 나’는 모두 내 실체다. ‘어떤 나’는 진실이고, ‘어떤 나’는 거짓일 수 없다. 나에 관한 텍스트는 다 일리(一理)가 있다는 이야기다. 단지 서로 다른 콘텍스트에서 편집된 결과인 까닭에 다른 것이다. 모든 콘텍스트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 관한 이야기가 모든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 진리(眞理)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가장 성숙한 의사소통은 상대방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일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래 당신 말도 일리가 있다.” 이를 내러티브 심리학에서는 ‘그럴듯함(verisimilitude)’이라고 정의한다. 상담이나 정신치료에서 이야기하는 ‘래포(rapport)’의 본질도 바로 이 ‘일리의 해석학’에 있다.

상대방의 ‘일리’를 이해하려면 상대방이 처한 ‘콘텍스트(con-text)’에서 구성되는 ‘텍스트(text)’ 형성 과정에 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이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편집되는 스스로에 관한 성찰을 통해 가능하다. 다시 말해 ‘2003년의 김정운’과 ‘2009년의 김정운’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타인의 일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기성찰’과 ‘일리의 해석학’의 심리학적 구조는 동전의 양면이다.

‘일관된 자아’에 관한 요구는 자아 구성 과정에 관한 고전적 심리학의 무지에서 나온다. ‘내 안의 나’는 항상 많다.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은 ‘오버’다. 일관된 자아에 관한 오버는 ‘기억의 억압’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억압된 기억은 타인의 내러티브를 왜곡하고, 부정한다. 이를 ‘소통의 부재’라고 한다.

잡스 이야기는 왜 빌 게이츠보다 재미있나
스티브 잡스 사후 바로 발간된 그의 전기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다. 100만 부를 훨씬 넘어 팔린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밀어낸 것도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이다(솔직히 난 김 교수의 책이나 스티브 잡스의 책이 많이 팔리는 게 몹시 배가 아프다. 그래서 나는 아직 청춘이다. 배가 아픈 것도 어쨌든 아픈 거니까). 도대체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왜 그토록 사람들의 흥미를 끌까.

일단 일찍 죽어서 그렇다. 영웅이 되려면 무조건 일찍 죽어야 한다. 멀리는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가까이는 이소룡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영웅은 죄다 일찍 죽는다. 사람들은 영웅의 느닷없는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불완전한 이야기를 어떻게든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길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방식으로는 절대 영웅이 될 수 없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완성돼 끝나기 때문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 편집 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일찍 죽는 것만으로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일이다.

영웅의 내러티브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 예술가나 혁명가의 내러티브는 불연속적이고,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로 충만하다. 의미가 건너뛰는 부분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채워나간다. 이를 ‘인구에 회자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의미 구성 과정에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자의 내러티브는 연속적이고, 내용은 일정하다. 열심히, 밤낮없이 연구하다 보니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는 단순한 플롯이 대부분인 과학자의 전기는 지루하다. 의미 구성이 일방적으로 완성돼 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매우 예술가적이다. 이리 튀고, 저리 튄다. “Stay hungry, stay foolish(계속 갈망하라, 어리석게 나아가라)”로 기억되는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연설은 당시 모든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보면 교만하기 그지없는 연설이다. 스탠퍼드 대학이라면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 중 하나다. 그 자부심에 가득 찬 스탠퍼드 대학의 졸업생들과 교수들 앞에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대학을 그만둔 것이 자신이 행한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다고 자랑한다.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당시 대학에서 가르쳤던 과목이란 죄다 쓸모없었고, 청강한 ‘서체과목’ 하나 겨우 쓸 만했다고 이야기한다. 이건 거의 조롱에 가깝다.

사생아로 태어난 이야기,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난 이야기, 암에 걸린 이야기로 좌충우돌하던 스티브 잡스의 연설은 ‘누구나 죽는다’로 끝난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며 희망에 가득 찬 젊은 대학생들에게 “죽음이야말로 삶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연설은 심통 그 자체다.

반면 2년 후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빌 게이츠는 아주 격조 있는 연설을 한다. 일단 자기처럼 중퇴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 졸업생들을 축하한다. 자기도 드디어 졸업장을 받게 되어 영광이라고도 한다. 또한 비록 중퇴를 했지만 자기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모두 하버드 대학에서 배웠다고 강조한다. 아주 예의 바른 태도다. 대학교에서 연설할 때는 적어도 이런 예의는 기본적으로 지켜줘야 한다.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선언하며 빈곤 퇴치,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환경 문제 등에 관한 빌 게이츠의 연설은 가히 도덕 교과서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 실제 기부단체를 설립해 자신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빌 게이츠를 누가 감히 비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빌 게이츠의 이야기는 별로 재미없다. 그다지 귀 기울여 듣고 싶지 않다. 반면 ‘기부’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관해서는 어떠한 이야기도 한 적이 없는, 아주 고약한 내용의 스티브 잡스 이야기는 참 재미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빌 게이츠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서 스스로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계몽한다는 이야기다. 일관되고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는 재미없다.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내러티브는 ‘진리’를 강요할 뿐, ‘일리의 해석’이 빠져 있다. 반면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상호작용적’이다. 잡스의 정서적·모순적·자극적 내러티브는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적극적 해석의 기회를 제공한다.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 낼 때만 ‘의미’있다. 진리를 계몽하는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스스로 도덕적으로 옳고, 정치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의미 편집’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 사회를 볼 때 정말 ‘일리’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와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cwkim@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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