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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장제스 초상화는 알았을까, 3년 뒤 내려질 줄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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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호 29면

1949년 1월 베이핑에 입성한 중국인민해방군이 철거할 때까지 3년1개월간 천안문 광장에는 장제스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현재 걸려있는 마오쩌둥 초상화보다 훨씬 컸다. 1946년 겨울의 천안문. [김명호 제공]

1945년 10월 10일 화베이(華北)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고궁 태화전(太和殿)에서 열렸다. 30년 전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국민 정부군 11전구 사령관이었던 항일 명장 쑨롄중(孫連仲·손련중)이 의식을 주재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50>

12월 3일 천안문 성루에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대형 초상화가 걸렸다. 1417년 6월 농민 출신 목수 콰이샹(<84AF>祥·괴상)이 설계하고 건조한 고궁의 정문에 걸린 최초의 인물 초상화였다. 충칭(重慶)이나 상하이(上海), 난징(南京)의 대형 건물과 관공서에 장제스의 대문짝만 한 초상화가 즐비할 때였지만 위치가 천안문이다 보니 상징성이 컸다.

8일 후 북방 동포 위문차 베이핑을 방문한 장제스는 고궁 인근에 임시지휘부 격인 행원(行轅)을 설치하고 태화전 앞에서 1만8000명의 학생에게 일장 연설을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훈시 같았지만 학생들은 8년간 항일전쟁을 지휘한 장제스의 말을 엄숙한 자세로 경청했다. 감히 박수갈채를 보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후에는 학생 대표가 선물한 칼을 차고 길 건너에 있는 동자오민샹(東交民巷)으로 향했다. 동자오민샹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베트남, 태국, 버마(현재 이름 미얀마)를 포함한 태평양전쟁 중국전구(中國戰區)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미 해군 육전대(陸戰隊)를 검열했다. 근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중국군 부대를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을 때보다 더 엄격했다. 3년 후 천안문 성루에 걸린 초상화가 딴 사람으로 바뀌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장제스의 방문 기간은 일주일에 불과했지만 베이핑의 중공 지하당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옌안(延安)에 있던 중공 지휘부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미국이었다.
장제스와 미국, 특히 루스벨트와의 관계는 복잡했다. 매일 싸우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 사이 같았다. 항일전쟁 시기에 중국과 미국은 혈맹이었다. 장제스와 루스벨트는 두 대국의 지도자면서 맹우였지만 모순과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주권문제가 가장 컸다.

태평양전쟁 발발 2년 후인 1941년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중국전구 최고사령관 직을 제의하며 미 육군중장 스틸웰(Joseph W Stilwell)을 참모장으로 파견했다. 중국에 온 스틸웰은 장제스가 쥐고 있던 중국군 지휘권을 이양받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중국군이 일본군과의 작전에서 허점을 보이거나 전투에 패할 때마다 지휘권을 요구했다. 군 지휘권은 국가권력의 핵심이었다. 갖은 풍상을 다 겪은 장제스가 순순히 내줄 리 없었다. “중국은 미국인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나라다. 천천히 생각해보자”며 지연작전을 폈다.

장제스의 속내를 루스벨트가 모를 리 없었다. “작전권 이양은 빠를수록 좋다. 미국의 지원에는 한계가 있다. 지난날의 모든 영광을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고 협박성 메시지를 보내도 장제스는 듣지 않았다. 도리어 “더 이상 군 지휘권을 요구하면 미국과 절교하겠다. 중국 단독으로 항일전쟁을 치르겠다”며 스틸웰의 소환을 요청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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