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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다시 태어났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1호 31면

종종 음악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대번에 현재 내가 사사하고 있는 아리에 바르디 교수와의 첫 레슨을 꼽겠다. 그곳은 그분의 명성을 듣고 내가 직접 찾아간 독일 고슬라시(市)의 한 아담한 홀이었다.

“나는 2층에 가서 들을게, 그래도 되지?” 그분은 발코니로 가서 앉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쇼팽의 24개의 전주곡 작품번호 28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떨려서인지, 흥이 나지 않아서인지 연주가 너무나도 안 되는 것이었다. 치면 칠수록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의욕을 상실해가며 꾸역꾸역 13번까지 다 연주했을 때였다.

“고마워!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16번을 연주해 줄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아! 아직 열 곡도 더 남았는데 더 이상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뜻일까? 그런데 하필 16번을!’ 16번은 기술적인 난이도가 가장 높은 곡이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연주를 시작해 어떻게 쳤는지도 모를 1분이 휙 지나갔다. 다시 숨죽이고 2층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분은 조용히 악보를 덮더니 한참 박수를 치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셔서 내 옆 피아노 앞에 앉으셨다.

“그럼 우리 레슨을 시작해볼까?” 그는 전주곡 13번을 펼쳤다. “Lento (‘아주 느리게’), 쇼팽이 Lento라고 적은 또 다른 곡들은 뭐가 있지?” 단연코 한 곡도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에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기 때문이었다. 아무 대답도 못 하는 나를 보고는 쇼팽의 이런저런 다른 ‘렌토’를 쳐주더니 이번에는 “그럼 F-sharp(올림바) 장조로 된 쇼팽의 다른 곡은 생각나는 것이 있니?”라고 질문하셨다. 머릿속이 더욱 텅 빈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한참 후에야 겨우 ‘야상곡 작품번호 15의 2번’이라고 답하자 눈이 두 배로 커진 그분이 “그렇지! 그리고 이것도 있지?” 하며 ‘뱃노래 작품번호 60’의 시작 부분을 쳐주셨다.

“그렇다면 쇼팽의 F sharp 장조의 성격을 정의할 수 있겠니?” “글쎄… calm한 것?” “그렇지! 또, 방향성이 크다는 것도 들 수 있겠지?” “그렇겠네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연관 지어 생각해보지 않은 점들이었다. “여기엔 매우 이상한 슬러(이음줄)가 있네? 두 마디, 두 마디, 또 두 마디에 사용했다가 여기 딱 한 마디에만 안 썼지? 왜일까?” 매일 봐 왔던 악보지만 맹세코 생전 처음 발견하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신기한 것을 이렇게까지 몰랐다니 나 스스로도 놀라웠다. “물론 나도 왜인지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이 팩트를 통해 최소한 이 부분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연주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 주셨다. 고작 첫 8마디를 가지고 벌써 40분도 넘게 마치 세계를 뽑아내는 느낌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제 그만, 다음으로 넘어갈까? 자, 여기 piu(조금) lento는 무슨 뜻일까?” “조금 더 느리게.” “물론 그렇지! 그럼 얼마나 더 느리게 연주하면 될까?” 그것은 당연히 연주자의 마음이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조금 더 느리게 연주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좋은 연주자라면, 쇼팽이 무엇을 의도했나 한번쯤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자, 여기를 봐. 왼손은 계속 8분음표를 연주하고 있지만 오른손은 앞과 달리 점2분음표가 아니라 2분음표를 연주하네? 그렇다면 쇼팽은 무의식적으로 앞부분은 두 개, 뒷부분은 세 개로 최소단위를 나눈 게 아닐까? 그렇다면 간단하겠다! 같은 박을 유지하되 앞은 세 개씩, 뒤는 두 개씩 끼워 맞추면 박자의 통일감이 이어지지만 확실히 다른 두 개의 박자가 생성되겠지?”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에 이렇게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작곡가의 의도에 이토록 다가가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이야말로 실로 태어나서 처음 만난 그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의 의도를 다 알 순 없겠지. 내 분석과 추측 역시 다 맞지 않을 수도 있고. 하지만 우리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쇼팽이 하늘에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럼 오늘 레슨 끝. 모두 엄청난 재주를 가진 네 덕분이야, 와 줘서 고마워!”
이렇게 내 음악인생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에게 물려받은 순수한 열정으로 가끔씩 며칠을 지새우기도 하면서.



손열음 1986년 원주 출생. 뉴욕필과 협연하는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 중이다. 올해 열린 제1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2위를 했다. 음악듣기와 역사책 읽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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