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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세상, 주민번호의 불편한 진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1호 31면

‘김정일 사망’과 ‘포털 주민등록번호 폐기’. 지난 연말 인터넷업계의 한 송년모임에서 술 안주로 도마에 오른 양대 이슈다. 이날 한 벤처기업인은 “묘하게 두 이슈가 현실 세상과 사이버 공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다 신묘년 끝자락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의미까지 부여했다. ‘포털이 앞으로 주민번호를 모으지 않겠다’는 소식에 이들은 왜 열을 올릴까. 그건 인터넷 세상의 주민번호에 ‘불편한 진실’이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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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막은 이렇다. 온라인에서 주민번호는 이용자의 본인 확인을 쉽게 하려는 수단으로 등장했다. 그러다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주민번호 수가 업계 위상(순위)을 자랑하는 잣대가 됐다. 여기에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 주민번호는 요긴한 정보가 됐다. 쇼핑몰업계 참석자는 “기존 이용자 정보로 마케팅을 펼치면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 우월하게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털어놨다. 포털들이 적지 않은 돈을 쓰면서 곳간(서버)에 고객 정보를 차곡차곡 채워 온 이유다.

이렇게 ‘약(藥)’이었던 주민번호가 신묘년엔 ‘독(毒)’이 됐다. 한국인들의 주민번호가 세계 해커의 놀잇감이자 돈벌이 대상이 된 것이다. 급기야 7월 네이트 3500여만 명, 11월 넥슨 1300여만 명의 정보가 해킹으로 유출됐다. 엄청난 고객 데이터가 털리면서 한국인의 주민번호는 사이버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글로벌 공용정보가 됐다. 중국 주요 포털에 ‘한국실명(韓國實名)’을 치고 클릭 몇 번 하면 주민번호 320만 건이 나온다. 주민번호 하나에 100원 가격으로 거래까지 되는 현실이다.

인터넷업계에서 주민번호는 효자가 아닌 사고뭉치로 바뀐 것이다. 더욱이 주민번호 없이 메일계정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구글·트위터·페이스북 등 해외 서비스가 선보였다. 네티즌은 속속 이들 서비스로 갈아탔다. 그래도 국내 서비스는 주민번호 올가미에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정부가 2007년 도입한 ‘인터넷 본인 확인제(실명제)’ 때문이다. 스팸메일, 악성 댓글, 개인정보 해킹 등 온라인 범죄를 막기 위해 이용자 실명을 주민번호 등으로 확인하는 제도다.

정부도 고민에 빠졌다. 사이버 부작용이 줄기를 기대했던 본인 확인제가 오히려 온라인 범죄의 온상으로 떠올라 국가적 약점이 됐기 때문이다. 주민번호 기반의 ‘한국형 인터넷’ 때문이다. 결국 방송통신위원회는 최근 인터넷 실명제를 사실상 없애고, 인터넷에서 주민등록번호 수집·이용을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어쩌면 포털의 주민번호 폐기는 사면초가에 빠진 업계와 정부의 ‘짜고 치는 고스톱’일지 모른다. 그래도 네티즌과 전문가들은 이를 환영한다. 갈라파고스섬에서 벗어난 한국이 국경 없는 사이버 바다에서 맘껏 도약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인터넷 세상이 무법지대가 되지 않으려면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무분별한 익명의 악성 글로 잘못된 정보가 마치 진실인 양 퍼지는 부작용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이제는 네티즌 스스로 자유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게 최선의 해법이다. 새해 임진년에는 한국의 인터넷 세상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으면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인터넷 강국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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