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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못다 핀 꽃 한송이’의 가수 … 국악계도 인정한 최고 뮤지션 김수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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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54)은 가수다. ‘못다 핀 꽃 한송이’(1983년), ‘젊은 그대’(84년), ‘나도야 간다’(84년), ‘정신차려’(89년) 등 그가 만들고 부른 노래는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기타리스트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또 ‘국가대표’ 음악감독이다.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2002 한·일월드컵, 지난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이르기까지 큰 행사의 음악을 김수철이 지었다. 그가 행사 음악을 맡은 데는 국악인이라는 배경이 한몫했다. 김수철은 ‘기타산조’라는 국악 장르를 창작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영화 ‘서편제’(93년), ‘태백산맥’(94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년) 등 많은 영화에 삽입됐다. 내년 개봉작 중 그가 음악을 맡기로 한 작품도 다섯 편에 이른다. 김수철은 다양한 음악 장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공부’하는 음악인이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김수철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색 모자를 쓰고 j와 만났다. 손에는 기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지만, 영화 ‘고래사냥’(84년)의 ‘병태’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배창호 감독, 최인호 원작의 이 영화에서 그는 배우 이미숙·안성기와 호흡을 맞췄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못다 핀 꽃 한송이’가 실린 1집 앨범이 나온 해에 영화를 찍었다.

●당시엔 인기 가수들이 영화를 찍는 게 붐이었죠.

 “아버지가 워낙 완강하게 반대를 하셔서 음악활동을 접은 직후였어요. 안성기 형한테서 어느 날 ‘만나자’는 전화가 왔어요. 제가 ‘형, 나 이제 음악 안 해요’ 했더니 ‘음악 얘기 아니니까 일단 나와봐’ 하는 거예요. 따라갔더니 배창호 감독이랑 소설가 최인호 형이 그 자리에 계시더라고요. 최인호 형은 그때 우리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죠. 인기가 대단하셨어요. 절 보시더니 두 분이 ‘딱 병태 맞네’ 하시더라고요. 한 달째 병태 역을 맡을 배우를 못 찾고 있었대요. 성기 형이 ‘병태같이 생긴 애를 한 명 안다’고 절 데려간 거죠. 그때는 성기 형도 확 뜨기 전이었어요. 그래서 개런티도 이미숙씨는 A급, 성기형은 B급, 저는 C급으로 받았어요.”

●가수로서 뜨고 나서 영화를 찍은 게 아니었군요.

 “1집 앨범 나온 게 그해 8월이었어요. 아버지가 워낙 반대를 하셔서 가수 활동 접으면서 기념으로 앨범 하나 남긴 것이었죠. 영화 촬영은 11월에 들어갔는데, 촬영 중에 노래가 떠서 방송국에서 영화사로 전화 오고 아주 난리가 났었어요.”

 ‘못다 핀 꽃 한송이’는 자전적 노래였다. 김수철은 중 2때 처음 기타를 접하고 독학으로 집에서 기타를 연마했다. 부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기타줄 사이에 종이를 끼우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연습했다. 고 2때 이미 가발 쓰고 서울 무교동의 클럽 무대에 설 정도였다. 고등학생이 밤무대에 서면 정학 처분을 받던 때다.

 대학(광운공대)에 진학한 뒤 밴드 ‘작은거인’을 결성, 78년 TBC 주최 ‘전국 대학축제 경연대회’에서 그룹 부문 대상을 받으며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친은 음악 활동에 반대했다. ‘대한민국은 자원이 없는 나라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부친의 철학이었다. 그래서 김수철은 음악의 길을 포기하고, 대학원(건국대 행정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차에 영화를 찍은 것이다.

 ‘못다 핀 꽃 한송이’가 확 뜨면서 김수철은 고민에 빠졌다. 고민을 풀어준 이가 최인호였다.

 “저랑 성기 형이랑 다 고민이 있었어요. 성기 형은 자기 아버지 친구분이 ‘커피 CF에 출연 좀 해달라’고 몇 년째 부탁을 해서 곤혹스러워했어요. 배우는 ‘연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형 생각이었어요. 저는 아버지가 반대하시지만, 음악을 계속하고 싶었고요. 최인호 형이 우리 얘기를 듣고 간단히 정리해 줬어요. ‘안성기, 너는 CF 해. 수철이, 너는 노래 왜 안 해. 둘 다 하라우’ 하고 말이에요.”

 최인호의 조언 덕에 안성기는 같은 커피 CF를 30년 가까이 하고 있고, 김수철의 ‘가수 인생’은 승승장구했다.

●안성기씨와는 어떤 사이였나요.

안성기(오른쪽)과 김수철.

“당시 제 절친이 송승환씨, 그리고 지금 CF 감독을 하는 김종원이었어요. 80년에 함께 클럽을 꾸려 소형 영화를 7편 만들었어요. 저는 영화 음악이랑 조명을 맡았어요. 영화 때문에 충무로 드나들며 성기 형을 알게 된 거죠.”

 김수철이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프랑스 청소년영화제에 ‘탈’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게 본선까지 진출했어요. 한국 젊은이 다섯 명이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이었어요. 그 영화의 음악을 만드느라 제가 국악을 공부했던 거예요. 그런데 외국에서 본선 진출까지 한 것을 보니까 ‘아, 우리 음악을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탁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가야금 산조, 아쟁 산조, 거문고 산조 같은 것을 듣기 시작했죠.”

●솔로가수로 뜨기 전부터 국악에 관심을 가졌다는 얘기군요.

 “그렇죠. 국악공부 한 3년 하다가 ‘고래사냥’ 찍은 거예요. ‘고래사냥’ 음악감독도 제가 했는데, 영화에 피리·플루트 협주곡이랑 각설이 타령을 집어넣었잖아요.”

●아버님은 이해해 주셨나요.

 “영화가 개봉된 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제가 가수로 성공한 것은 못 보고 가셨죠. 아버님 산소에서 ‘음악공부도 공부니까 음악공부로 바꾸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어요. 본격적으로 낮에는 노래 부르고, 밤에는 국악공부를 했어요.”

 가수 김수철은 80년대 중반 10대 가수상을 단골로 받았다. 음악으로 버는 돈은 국악앨범 만드는 데 썼다. 김수철이 그간 낸 국악 음반이 30장이 넘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영화 ‘서편제’(93년) 음악도 나온 것이다.

 “돈, 엄청 날렸죠. 국악 음반으로 돈을 번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래도 우리 소리를 공부할수록 국악이 훌륭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어요. 이걸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무용 음악, TV 드라마 음악, 영화 음악, 행사 음악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됐어요. KBS 대하드라마 ‘노다지’ 음악을 맡게 됐는데, 그 드라마의 메인 테마 음악이 아쟁 연주곡이었어요. 그래서 86년 아시안게임 음악감독 제의가 들어왔던 거예요. 행사마다 결과가 나쁘지 않았어요. 올림픽, 대전엑스포, 월드컵, G20 정상회의까지 여섯 개 행사의 음악감독을 맡게 된 거죠.”

 행사에 단골로 등장한 음악은 그가 87년에 만든 ‘기타 산조’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서 국악계에서도 김수철을 국악인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사실 국악계에서는 가수들이 국악 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왜냐하면 고작 몇 달 배우고서 몇 년 한 것처럼 함부로 말하고 다니니까요. 처음엔 저에 대해서도 그럴 거라고 생각들 하셨나 봐요. 91년 명창 박동진 선생님이랑 같이 공연을 했는데, 박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네가 진짜로 국악 하는 것을 내가 이제야 인정한다’ 하셨어요.”

●음악감독으로서 뭘 전하고 싶었나요.

 “청소년이나 국민께 우리 소리의 훌륭함을 알리고 싶었어요. 국내에선 우리 소리를 활성화하고, 세계적으로는 ‘한국에 이런 훌륭한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사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소리예요. 소리에 마음을 담아 글로 표현하면 노래가 되고, 소리를 영화에 담으면 영화 음악, 공간에서 빛과 소리가 조화를 이루면 행사 음악이 돼요. 결국 저는 소리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소리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가요·행사 음악·기타산조·영화 음악·무용 음악 등 여러 송이 꽃으로 피어났다.

●다양한 음악장르에서 인정받는 비결이 뭘까요.

 “어떤 작업을 맡든지, 그게 마지막인 것처럼 해야 해요. 그래야 기회가 또 와요. 조금이라도 내 힘을 남겨 놓으면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김수철, 갔네’ 이런 얘기가 나와요. 그래서 제가 ‘옛날 얘기’는 잘 안 하려고 해요. ‘왕년에 내가 말이지’ 이런 얘기 하면 이미 늙은 거예요. 선배가 되면 지갑과 귀는 열고, 입은 닫으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계속해서 공부해야 하고요.”

●공부요? 공부하면 보상이 옵니까.

 “꼭 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공부를 안 해봐서들 그래요. 누구든 한 분야를 20년 하면 다 전문가가 돼요. 그런데 대충 10년 하고선 다른 생각을 해요. 누구든지, 뭘 하든지 20년을 그 분야만 하면 그것으로 먹고살 수 있다고 저는 믿는 사람이에요.”

●잘나가다 보니 20년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하는 일에 돈과 명예가 따라와야지, 거꾸로 돈과 명예를 좇아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공부가 왜 중요한 줄 아세요. 공부를 해야 자기가 부족한 것을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이 사실 겸손해요. 어설프게 공부한 사람들이 그렇지를 못하죠. 그런데요, 대중은 다 압니다. ‘저 사람은 좀 안됐지만 열심히 하는구나‘ 하고요. 그럴 때 대중이 성원을 해줘요. 생각해 보세요. 유행은 어차피 돌고 돌아요. 20년 동안 계속 잘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것이지. 그러니 뭐든 꾸준히 해야 해요.”

●10년 뒤에는 뭘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제가 그 점이 부족해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없었어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막 미친 듯이 한 것뿐이죠. 그래도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10년 뒤에는 아마 우리 소리를 가지고 세계 각국을 들락날락하고 있을 것 같네요. 계속 도전하고 있겠죠, 뭐.”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이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저는 항상 과정 속에서 음악을 하고 있다고 봐요. 그러니 항상 기본에 충실해야 해요. 기본에 충실하고 있는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알아요. 내가 지금 ‘오버’하고 있는지, 뭘 모르면서 굉장히 아는 체하는 것은 아닌지, 과욕을 부리지 않는지는 본인이 다 알잖아요. 그때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그러면 상식을 지키기가 어려워요. 자기가 하는 것이 자기 얼굴에 다 나온다고 하잖아요.”

j 칵테일 >> 명동성당·길상사에서도 공연한 김수철

김수철은 서울 무교동 클럽에서 뉴욕 유엔본부 총회의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대에 섰다. 개중에는 서울 명동성당, 그리고 성북동 길상사도 포함돼 있다.

 “고 2때였네요. 명동성당에서 매년 크리스마스에 청소년음악제를 했어요. 성당 학생들이 제게 공연을 해달라고 해서 가긴 갔죠. 가보니 무대가 성당 안인 데다 신부님도 앞에 계시니 분위기가 참 경건하잖아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조용한 곡 몇 곡으로 연주를 시작했죠. 그러다 후반부는 록으로 분위기를 바꿔 버렸어요. 록이 나오니까 신부님이 당황하시면서 뒤에 있는 관객들 얼굴을 살피시더라고요. 다행히 관객들 반응이 좋으니까 신부님도 안도의 한숨을 쉬시더만요. 신부님이 ‘내년에 또 와달라’ 하시던데 ‘내년이면 제가 고3이라 기약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사양을 했죠. 나중에는 못 갔네요.”

 길상사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은 고(故) 법정 스님<오른쪽 사진>과의 인연 덕분이었다.

 “1987년에 처음 뵀어요. 기타산조 전국 순회를 할 때인데 법정 스님이 제 공연에 찾아오셨어요. 제 국악 중 ‘황천길’이라고 있는데 그걸 즐겨 듣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대학 때 『무소유』를 읽고 감동을 받아 스님을 존경하고 있었죠.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2006년에 또 전화를 주셨어요. 그때 제자분들이 ‘법정 스님 출가 50년’을 기념해 조그만 행사를 기획하고 있었나 봐요. 스님은 안 하시려 했는데, 제자분들을 못 꺾으셨나 보죠. ’나일세, 제자들이 음악회를 하자고 하는데, 자네에게 음악을 좀 부탁하면 안 되겠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국악과 가요를 반반 섞어서 공연을 해 드렸죠. 다음 날 제게 전화를 하셔서 ‘황천길은 역시 참 좋아’ 하셨어요. 제 음악을 참 좋아해 주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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