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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정’ 김일성 ‘일’ 따서 이름 … 일찍부터 제왕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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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다섯 살 때인 1947년 김일성(오른쪽)을 따라 만경대(김일성 생가)를 방문해 증조모 이보익(왼쪽)과 권총을 들고 촬영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42년 2월 16일 옛 소련 하바롭스크 인근 브야츠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소련 영내에 있던 동북항일연군 고위 간부였던 김일성과 같은 부대 대원인 김정숙 사이의 장남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백두산 밀영(密營)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보르실로프에서 태어났다’는 이설도 있다. 이름은 어머니에게선 정(正) 자를, 아버지로부터는 일(日) 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유년 시절 김정일은 소련식 애칭인 ‘유라’로 불렸다.

 군부대에서 태어난 김정일은 45년 11월 25일 어머니 김정숙과 평양으로 올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군부대라는 열악한 환경은 그의 초기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줬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46년 그는 고관 자녀 교육을 위해 만든 평양 남산유치원에 입학했다. 아버지 김일성이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활동하던 시기다. 그 시기 어머니 김정숙의 교육이 큰 영향을 줬다고 북한 문헌들은 전한다. 90년대 출간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일성 주석은 “김정숙 동무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김정일 동무를 미래의 영도자로 키워 당과 조국 앞에 내세워 준 것입니다. 동무들은 내가 김정일 동무를 후계자로 키워 냈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기초는 김정숙이 쌓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김정숙은 공장이나 농촌을 직접 둘러보고 실정을 파악해 김일성에게 전하곤 했는데 꼭 맏아들 김정일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면서 일반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예의범절을 배우도록 했다. 일찍부터 ‘현장학습’을 시킨 셈이다. 김정일은 여섯 살때인 48년 9월 남산인민학교 예비반에 입학한다. 우리의 초등학교다. 그해 9월 9일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김일성이 초대 수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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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년 일곱 살의 김정일은 ‘엄마’를 잃었다. 김정숙이 출산 도중 사망한 것이다. 북한 문헌에는 김일·김책·최용건 등 빨치산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지면서 “아들을 혁명가로 잘 길러 달라”고 당부했다고 나와 있다. 또 김정일에겐 “아버지를 잘 받들고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완성해야 한다”고 유언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자란 김정일은 74년 후계자로 확정된 뒤 70년대 말 김정숙의 고향 함북 회령에 동상과 기념관을 짓고, 81년엔 양강도 신파군을 김정숙군으로 개명했다. 또 81년엔 여성들이 출산 때 어머니처럼 사망하는 일이 없게 2000병상 규모의 산부인과 종합병원인 평양산원을 건설했다.

 어머니의 사망 이듬해인 50년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은 어린 김정일을 다시 고생길로 몰았다. 동생 경희, 숙부 김영주와 만주로 피란을 떠났다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 52년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3~4개월 동안 만경대혁명자유자녀학원에서 공부했다. 김일성이 항일유격대 시절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의 2세를 위해 설립한 학교다. 현재 이름은 만경대혁명학원이며 북한 당·정·군의 주요 간부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다. 이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지지세력이 됐다.

1998년 김정일의 국방위원장 추대 직후 평양 시내 김일성광장에서 축하모임을 하고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대형 초상화와 대동강 건너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중앙포토]

 김정일은 전쟁과 교육제도 개편으로 남산인민학교, 만경대혁명자유자녀학원, 삼석 인민학교, 평양 제4인민학교를 다니다 54년 9월 평양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역시 고위 자녀들의 교육을 전담하는 곳이다. 김정일은 평양 제1중 2학년 때 소년단 위원장을 했고 고급중학교(우리의 고등학교) 때인 57년엔 조선민주청년동맹(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북한 문헌들은 이 시기 김정일이 만경대와 칠골 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보천보·삼지연을 비롯한 백두산 일대 혁명전적지를 답사하는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또 고급중학교로 진학하자마자 “우리의 것을 더 잘 배우고 빛내이자” 등의 구호를 만들어 학생들이 사대주의·교조주의와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도록 이끌었다고도 한다. 북한 문헌들의 이런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김정일이 시대 상황에 발맞춰 활동했고 일찍부터 지도자로서 품성을 보였다고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성장기 김정일은 특별교육을 받았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사회과학 과목별로 평양시내의 유명 선생을 가정교사로 맞아 배웠다. 그런 교육은 대학 시절까지 이어졌다. 김정일은 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진학했다가 이듬해 61년 7월 22일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북한의 특권층인 당원이 된 것이다.

 그는 ‘대학당위원회’ 소속 평 당원일 뿐임에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내각회의, 최고인민회의, 군사간부회의, 정치간부회의의 주요 회의를 방청하는 특혜를 누렸다. ‘예비 정치수업’이었다. 또 노동당 정치위원회의 결정으로 그의 대학 생활 전반을 관리하는 전담교수가 지정되고 각 분야 최고 실력자들로 김정일 지도교수 그룹이 구성되기도 했다. 63년부터는 김일성이 인민군 간부를 만나거나 군부대를 방문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동행했다. 대학생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제왕학’ 수업을 받은 것이다.

안에선 숙청하며, 밖에선 아웅산·KAL기 테러 주도

후계자 부상 ~ 김일성 사망

김정일 위원장이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조의를 표하고 있다. 왼쪽은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95년 사망), 오른쪽은 숙부 김영주. [중앙포토]

◆후계 부상=1964년 초 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6월 19일 노동당 조직지도부 중앙지도과 지도원이 됐다. 당 조직 지도부는 ‘당 속의 당’으로 불리는 실세 기구다. 지도원 김정일은 이른바 ‘갑산파 반당사건’을 적발하고 관련자들을 숙청하는 작업을 밀어붙였다. 이 사건은 당권이 김일성에게 집중돼 가자 박금철·이효순 등 갑산파들이 제동을 걸고 나선 사태다.

 김정일은 67년 4월 열린 당 중앙위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이들의 ‘죄상’을 폭로하고 추궁한 뒤 박금철과 대남사업 총국장 이효순, 선전선동부장 김도만 등 갑산파 출신 주요 간부 20여 명을 출당시켰다. 회의 직후 김정일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 지도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이른바 ‘사상투쟁’을 벌인다.

 김정일은 전국에 ‘김일성 혁명전적관’을 건립하고 김일성 어록을 발간하는 등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69년 1월엔 이 작업의 걸림돌인 민족보위상(현 인민무력부장) 김창봉과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도 숙청했다. 김정일은 군내 당 조직과 정치기관의 역할을 강화하고 당 조직지도부가 군을 장악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김정일은 승승장구했다.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부장을 지낸 뒤 73년 9월 당 조직 및 선전 담당 비서도 겸했다. 명실공히 후계 지위를 굳혀갔다.

 71년 5차 당 대회를 계기로 김일성 1인 지배체제가 완성됐다. 여기서 노동당의 지도사상을 김일성 혁명사상으로 선언했다. 또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의를 폐지하고, 비서국의 위상을 강화하며 김일성을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했다. 김일성의 권력을 크게 강화하는 방향의 권력구조 재편을 완성한 것이다. 그 작업을 김정일이 주도했다.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추대된 것은 74년 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다. 비밀리에 진행된 이 회의에서 그는 정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고 ‘공화국 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후계자로 공식 선출된 것이다. 32세 때다. 그러나 여전히 대외에 공표되지 않았다. 다만 북한의 각종 공식 매체들은 이때부터 김정일을 ‘당 중앙’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김정일은 후계체제 강화에 전력투구했다. 김일성주의를 체계화하고 “나의 결론과 결정과 비준(결재)은 곧 수령님의 그것”이라고 단언했다.

 당과 정부, 군대를 개편하고 장악했다. ‘김정일 선집’ 같은 북한 문헌에 따르면 ▶후계 선출 직후인 74년 4월부터 당과 정무원(현 내각)까지 지도 범위를 확장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당 전문부서와 정무원을 ▶75년 5월에는 정치위원회와 군사위원회를 제외한 당 전체를 장악했다. 곧 79년엔 군도 장악했다. 김일성 우상화와 반대파 제거를 통해 후계 입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80년 6차 당 대회에서 김정일은 후계자로 공표됐다. 그는 김일성과 함께 당내 3대 권력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 당 비서,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모두에 선출돼 ‘미래의 수령’ 지위에 올랐다. 이후 김정일은 국가 모든 부분의 실권을 장악했다. 86년엔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정치적 생명은 무한하다’는 내용을 담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발표했다. 그는 이념과 실질 모든 부문에 걸친 지도자가 됐다. 사망한 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86년부터는 김정일이 지도자였다”고 밝힌 바 있다. 

 김정일의 입김은 대남 공작까지 확장됐다. 83년 10월 9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버마(현 미얀마) 랑군(양곤) 국립묘지 폭파를 지시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해 17명의 공식·비공식 수행원이 사망했다. 이어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87년 11월 대한항공 858기가 벵골만 상공에서 폭파돼 대부분 중동 근로자였던 승객과 승무원을 비롯해 115명이 사망했다. 이 테러가 북한 공작조 김현희·김승일이 김정일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한국 정부는 파악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소련을 비롯해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붕괴가 시작되면서 김정일 체제는 시련의 터널로 들어간다. 아버지 김일성이 94년 사망한 뒤 가뭄, 냉해,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덮치면서 ‘고난의 행군’길로 접어든 것이다.

선군정치로 고난의 행군 돌파, DJ 회담 뒤 ‘은둔’ 벗어

고난의 행군~정상회담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오른쪽)이 영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인사말을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김일성 사망=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다. 묘향산 초대소에서 김일성이 심장 발작을 일으키자 평양에서 구조 헬리콥터가 떴다. 그러나 태풍 속에서 초대소 착륙을 시도하다 추락했다. 북한은 7월 9일 정오, 이번처럼 특별방송을 했다. “김일성 주석이 심장 동맥 경화에 의한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김정일은 당초 10일로 정했던 애도 기간을 100일로 늘렸다. 김일성 추모 물결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이 시기 사우나에 들렀던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장이 당적을 박탈당하고, 해임되는 등 ‘불충’에 대한 처벌도 이어졌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슬로건 아래 김정일은 김일성 ‘영생화 작업’을 벌였다. 김일성 주석이 사용하던 집무실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조하고 여기에 영구 보존 처리한 김일성 시신을 안치해 성역화했다. 김정일은 공식적인 권력 승계도 미루고 3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사망 이틀 전 있은 ‘경제부문 일꾼회의’에서 김일성이 밝힌 지침을 ‘수령의 유훈’으로 규정해 기본 정책 방향으로 삼았다. 김일성의 노선과 정책을 고수할 것도 천명했다. 97년 7월 8일 3년상을 마치면서 김일성 생일을 태양절로, 그가 태어난 1912년을 ‘주체 연호’의 기준연도로 만들고 헌법도 ‘김일성 헌법’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난의 행군과 선군정치의 대두=김정일은 이미 20년에 걸쳐 자신의 통치체계를 완성했다. 그러나 세습은 권력의 약점이었다. 그 아킬레스건을 보완하기 위해 어머니 김정숙도 빨치산 여장군으로 신격화했다. 자신의 출생지를 민족의 영산 백두산으로 만들어 세습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상황에서 닥친 경제난은 정치 불안을 불러왔다.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망명했고 인민군 6군단 내에선 반김정일 세력이 적발됐다. 노동당 정치국 위원이자 평안남도당 책임비서인 서윤석, 문성술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비롯한 당·정 고위 간부 수십 명이 간첩혐의로 숙청됐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혐의를 벗고 복권됐다. 그러나 체제와 관련해 이어지는 사태는 사회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전대미문의 자연재해와 이로 인한 식량난 악화는 당과 인민보안성, 국가안전보위부 같은 공안기구들의 사회 통제기능을 마비시켰다. 1990년대 말 공장·기업은 가동을 멈췄고 아사자가 UN 통계로 20만~30만 명(일부에선 300만 명까지로 추정)으로 치솟았다. 체제 존립이 위협 당할 지경이 됐다.

 이처럼 무정부 상태와 같은 사회를 다시 장악할 강력한 수단으로 선군정치가 시작됐다. ‘붉은 기 사상’과 ‘혁명적 군인정신’ ‘총폭탄정신’ ‘수령 결사옹위’가 강조되고 군대를 사회가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로 내세웠다. 선군정치는 군 장악력을 높여 도전의 싹을 잘라내면서도 붕괴된 경제를 되살리려는 다목적용이었다. 북한 문헌들은 김정일이 "인민군대를 주력으로 하는 선군정치로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고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진격로’를 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시기 발전소, 수로, 토지 정리를 비롯한 인프라 건설의 핵심 노동력으로 군이 투입됐고 부진한 농업 생산력 회복에도 군이 파견됐다.

 그런 속에서도 김정일은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총비서에 추대됨으로써 김일성의 당권을 계승했다. 그러나 통치 방식은 아버지와 달랐다. 김일성은 북한 방방곡곡을 누비고 공개 연설을 통해 ‘인민의 어버이’로, 일본과 미국 ‘제국주의’를 물리친 ‘민족의 영웅’으로 각인돼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측근정치, 밀실정치와 같은 비공식적 통치 방식을 축으로 했다. 충성을 다하는 측근들에 대해선 소소한 집안 일까지 챙겼다. 불안한 정치·경제적 상황 속에서 엘리트들을 자기를 중심으로 운명공동체로 결집하도록 만들었다. 현지지도를 했지만 아들 김정일을 평양에 두고 지방을 다닌 김일성과 평양에 아무도 없이 지방을 돌아다녀야 하는 김정일의 입장은 달랐기 때문에 엘리트 포섭에 신경 썼어야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정일은 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고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규정했다. 사실상 주석제를 폐지한 것이다. 새 헌법은 형식적으로 국방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내각 총리가 권력을 분점했다. 그러나 실제론 국방위원회의 김정일 위원장이 국가 주권과 행정권을 모두 장악하는 최고 기관으로 기능했다. 북한의 문헌들은 이를 김일성의 혁명 위업을 완성해 나가기 위한 정치체제이며 혁명적인 국가기구체계라고 주장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29일 평양을 방문한 정주영 현대건설 명예회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방북이었다. 사진 아래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김용순 아태위원장, 정주영 명예회장, 김정일 국방위원장,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이은봉 차장(정 명예회장 전속 사진 담당). [중앙포토]

 ◆강성대국 건설=김정일의 98년 1월 자강도 현지지도 이후 북한 문헌들은 새 시대 정신으로 ‘강계정신’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강계정신은 자력갱생을 통해 ‘고난의 행군’의 어려움을 이겨냈음을 강조한 용어다. 또 김정일의 98년 3월 함경북도 성진제강연합기업소 현지지도 이후 ‘강선속도’ ‘성강의 봉화’ 같은 표어가 나왔다. 모두 경제분야에서의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다. 98년 개정 헌법은 지방 및 공장, 기업소들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개인 소유 대상물도 늘려 시장경제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또 비록 실패했지만 신의주를 특구로 지정하는 등 대외 개방도 시도했다. 99년 김정일의 경제부문 현지지도는 27회로, 같은 해 군부대 시찰 횟수인 31회와 거의 비슷하다. 이는 김정일이 경제 재건에 집중했음을 보여준다.

 김정일은 99년, 2000년 잇따라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와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에서 결정적 전진을 이룩할 데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경제 재건과 인민 생활 회복을 위해 실리주의를 내세웠다. 선군정치와 실리주의는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양대 축이 됐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80년대 후반 이후 시종 마이너스 성장을 해온 경제는 99년 처음으로 플러스로 돌아섰고 전반적인 경제 상황과 식량 사정이 호전됐다.

 ◆남북 정상회담 ‘우리 민족끼리’=김정일은 ‘김일성이 생전에 제시했던 통일 방안들을 유훈 관철 차원에서 계승해 나간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김대중 정부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화해협력 선언’은 ‘우리 민족끼리’를 요구하는 김정일에게 경제 활성화의 기회를 줬다. 2000년 6월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북한이 남북 관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고 있는 ‘6·15 남북 공동선언’이 채택됐고, 김정일에 대한 세계의 인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정상회담에서 "사람들이 은둔의 지도자라고 하는데 (김대중)대통령 덕분에 은둔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은둔 속의 독재자’가 아닌 ‘세계 속의 김정일’이라는 이미지를 심으려 노력한 것이다.

 공동선언에 밝힌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라는 자주 원칙 표현은 ‘우리 민족끼리 이념’과 민족 공조론으로 발전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남북 교류는 8·15 이산가족 상봉, 비전향 장기수들의 북한 송환, 남북 장관급회담과 국방장관회담, 남북 경제 실무접촉을 거쳐 빠르게 발전됐다. 금강산 관광에 이은 개성공단 건설과 도로 및 철도 연결, 대규모 경제시찰단 남한 파견, 농업과 경공업 등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 남한 예술단의 방북 공연은 발전이고 변화였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성사되고 ‘10·4 선언’이 채택돼 남북 경제협력과 교류는 더욱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통일문화연구소, 정용수 기자

김정일 1942~2011
출생에서 사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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