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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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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호 21면

연말은 연말이다.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도 캐럴송이 들려오고 예쁘장한 크리스마스트리가 곳곳에서 반짝인다. 하지만 스산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직장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 중에 수무푼전(手無分錢)이 있다고 한다. ‘내 손에 나눌 돈 한 푼이 없다’는 자조와 다름없지만 올해 자본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매스컴을 보면 교역 1조 달러 시대, 대기업과 은행의 조 단위 영업이익 등 돈이 넘쳐 흐르는 것 같은데 왜 내 손엔 돈이 없을까. 아마 서민들의 공통된 소회일 것이다. 돈이 어디 갔을까. 잠들어 버렸나.

증시 고수에게 듣는다

분명한 건 돈은 잠깐 자는 듯해도 계속 잠들어 있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 영화 월스트리트의 2탄 제목 ‘돈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Money Never Sleeps)’는 자본시장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말이다. 내년을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분들은 ‘동틀 때가 가장 어둡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난관이 없는 성장은 없다. 미국과 중국 한국에서 잠자던 돈들이 깨어날 때가 임박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그 시기를 너무 앞서 예단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년 증시의 실마리를 풀고 서서히 깨어날 돈의 향연을 기대한다면 잠든 돈의 흐름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세상에 돈이 많이 풀렸다. 미국의 경우 두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로 엄청난 돈을 시장에 풀었다. ‘헬기에서 돈을 뿌려댔다’는 표현까지 나왔다. 자산가격은 화폐의 명목금액 표시로 이뤄진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올해 증시가 어려웠던 건 사라져 버린 돈 때문일지 모른다.

우선 유럽의 돈을 보자. 일단 유럽으로 빨려 들어간 자금의 상당 부분은 이미 ‘불쏘시개’로 타 버렸다. 2년째 각종 합의가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마는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보면 그 사이 참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현재진행형이다. 내년 2~3월께 집중될 유럽의 국채 만기와 유럽 은행권들의 은행채 만기를 앞두고 해법은 오리무중이다. 현재 풀린 돈의 상당량은 남유럽의 부채 구조조정, 재정적자 메우기, 부채 연장 등 비효율적·비생산적 소모성 실탄으로 들어갔다.

미국은 어떤가. 연방은행이 자산을 대거 확충하면서 유동성 보따리를 두 차례에 걸쳐 풀었다. 그 결과 부분적으로는 돈의 회전율이 둔화된 상황에서도 양적완화라는 엄청난 물량 공세로 인해 돈이 풍부해진 점은 분명하다. 자금의 상당 부분은 미국 금융회사의 자본 확충, 디레버리징(차입 축소)에 쓰였다. 남은 돈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창고로 돌아가 잉여지준이라는 형태로 잠자는 경우가 많다.

중국은 2009~2010년 화끈하게 돈을 풀었다. 재정투자 4조 위안을 포함해 통화량을 20조 위안이나 늘렸다. 이 과잉유동성은 중국의 금융시스템상 해외로 나가지는 못하고 국내에서 부동산 거품만 엄청나게 부풀렸다. 그 후유증을 올해 내내 긴축이라는 형태로 견디고 있다. 최근 지급준비율 인하로 기대가 커졌지만 내년에도 그동안 풀린 돈을 통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한국은 최근 은행권에 돈이 기록적으로 몰려들었다. 금리 3%대인데도 예금성 수신이 급증했다. 물가 4%대에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 상태가 최장기간인 16개월째 기록 중이다. 돈이 잠들어 버린 것이다.

국가가 아닌 투자상품으로 보면 올해 돈이 금에 안착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돈이 잠자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금은 인류 최초이자 마지막 돈이다. 금은 ‘가치의 보전’이라는 근원적인 화폐 기능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자산이다. 하지만 반대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금융의 회전과 유동성’이라는 기능을 가장 극명하게 거부하는 자산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돌아야 돈이다. 이렇듯 큰 틀에서 본다면 돈은 디레버리징에 쓰이는 한편 취약한 금융회사의 자본 확충이나 부동산으로 잦아들어 있다. 타 버리거나 잠자 버렸다.

그런데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유럽의 문제는 재정의 부분적인 통합으로 나아가면서 양적완화와 비슷한 방식의 결말이 날 수밖에 없다. 물론 순탄치 않고 변동성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올 하반기부터 분명 선순환 조짐을 보인다. 미국에서는 잠든 돈이 깨어날 조짐이 엿보인다. 유럽 쪽으로 녹아 들어가던 달러의 향배도 서서히 신흥시장의 성장을 주목할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한국도 은행권에 돈이 몰리는 지금 같은 상태가 계속되긴 어려울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 최근 금값의 하락세도 주목할 만하다.



서재형(47) 2004~2008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주식운용본부장을 지냈다. ‘디스커버리’ ‘3억 만들기’ 등 펀드를 맡았다. 지난해 말 김영익 전 하나대투증권 리서치센터장과 자문사를 설립해 한 달도 안 돼 1조원이 넘는 돈을 모았다.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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