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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거침 없는 선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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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대구 동화사 조실인 진제 스님이 조계종 13대 종정으로 14일 추대됐다. 진제 스님이 종정추대회의가 끝난 후 이를 부처님께 고하는 고불식(告佛式)을 하기 위해 조계사 대웅전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불교 조계종 13대 종정(宗正)으로 14일 추대된 진제(眞際) 스님은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으로 꼽힌다. 이번에 함께 종정 물망에 올랐던 송담(松潭) 스님과 진제 스님을 묶어, 중국 당나라 때 두 고승인 ‘남(南)설봉, 북(北) 조주’에 빗대 ‘남 진제, 북 송담’이라고 부르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스님을 여러 차례 친견(親見)해 진면목을 잘 아는 이들은 스님이 “언제 어디서나 법문(法門·설법)을 호호탕탕하게 잘 하시는 분”이라고 증언한다. ‘살불살조(殺佛殺祖·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큰 스님을 만나면 큰 스님을 죽여라)’, 즉 공부에 자신 있다면 수행 기간이 짧은 젊은 수행자라도 큰 스님에게 대등하게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스님은 자칫 살벌한 법거량(法擧揚·공부의 깊이를 재보는 일) 전통이 살아 있는 선불교에서 어느 누구와도 자신 있게, 또 거침 없이 맞상대를 해왔다. 어떤 도전에도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수행력을 갖춘 분이라는 얘기다.

 특히 스님은 수행자나 일반 신자, 타 종교 지도자와의 법거량 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대답하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대응으로도 이름 높다. 공부의 깊이가 깊고 사유의 폭이 넓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스님의 이런 면모는 젊은 시절 남다르게 치열했던 정진 때문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1934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스님은 열아홉 살 때인 53년 석우(石友) 선사를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석우 선사를 존경하는 오촌 당숙을 따라 뵈러 갔다가 선사로부터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좋지만 금생(今生)에 사바세계에 안 나온 것으로 하고 중 놀이를 해보지 않겠는가”라고 권유를 받은 게 계기가 됐다. 곧바로 부모의 허락을 받고 출가했다.

 스님의 공부가 깊어지기 시작한 건 67년 당대 선지식(善知識·깨달음을 얻은 고승)으로 이름 높던 향곡(香谷) 스님을 만나면서부터다. 석 달 동안 섭취한 과일이라곤 사과 한 개 반뿐이었을 정도로 궁핍한 가운데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러면서 향곡 스님이 내려준 두 화두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다.

 두 화두는 ‘높은 나무 가지를 입으로 물고 매달려 있을 때 누가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를 묻는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열반 직전의 마조(馬祖) 선사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자 답으로 돌아온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다.

스님은 두 화두를 각각 2년, 5년 씨름한 끝에 뚫어내고 깨달음을 얻었다. 때문에 스님은 선불교를 중흥한 경허(鏡虛) 스님으로부터 시작해 혜월(慧月)-운봉(雲峰)-향곡 스님으로 이어지는 영남 지역의 법맥(法脈)을 잇는 선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스님은 불교의 대중화·세계화에도 앞장서 왔다. 지난 9월 뉴욕 맨해튼 리버사이드 교회를 찾아 진리를 찾는 문제에 관한 한 종교 간 구별이 없음을 강조했다. 2002년에는 중국과 일본의 선승을 초청해 자신이 조실(祖室·사찰의 최고 어른)로 있는 해운정사에서 국제무차선대회를 열었다.

한·중·일 세 나라의 스님은 물론 대회에 참석한 일반 불자들과 법거량을 벌였다. 스님은 현재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 등을 맡고 있다. 종정 임기 시작일은 현 법전(法傳) 종정의 임기가 끝나는 다음 날인 내년 3월 26일이다.

신준봉 기자

◆종정 추대 수락 말씀

원로대종사님들께서 부덕한 산승(山僧)을 종정에 추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 드립니다. 산승은 앞으로 우리 종단의 화합과 수행(修行)을 위해 이사(理事)방면에 원로스님들의 고견을 받을 것이며, 동양 정신문화의 정수인 간화선(看話禪)을 널리 진작하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진제 스님의 수락 법어(法語)

 大智如愚人莫測(대지여우인막측)

 收來放去亦非拘(수래방거역비구)

큰 지혜를 가진 이는 어리석어 보임이나, 사람들이 헤아리지 못함이요

진리의 전(廛·가게)을 거두고 놓는 데 또한 걸림이 없음이로다

◆종정(宗正)=조계종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불법(佛法)의 상징이다. 때문에 성철 스님을 비롯해 효봉·청담 스님 등 최고의 선승(禪僧)들이 추대돼 왔다. 종단 행정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실권은 없다. 하지만 ‘부처님 오신 날’ 등 종단의 주요 행사와 안거를 맞아 법어(法語)를 내리고, 종단의 모든 스님들에게 계(戒)를 수여하는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 위촉권, 스님들에 대한 포상·사면 등의 권한을 갖는다. 임기는 5년,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종단의 행정권은 총무원장이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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