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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 10시간 신현준

중앙일보

입력

영화는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두시간,길어야 네시간 안에 관객의 감정을 흔들어야 한다. 시간이 화두이기는 영화보기도 마찬가지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보면서 감동하느냐 골아 떨어지느냐는 전적으로 영화 속 시간과의 화해 여부에 달렸다. 배우에게 가장 어려운 일도 촬영 시간과의 싸움이다.전장 같은 현장에서 촬영 시간의 파도를 타지 못하는 배우는 길게 성공하기 어렵다.

그를 만나기 위해 정오의 소방서를 찾았을 때 신현준(33)은 잠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날은 더웠고 태양은 강렬했다. 요컨대 1백% 7월의 태양이었다. 새 영화〈싸이렌〉촬영이 한창인 서울 양천소방서는 한낮의 태양열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 짙은 회색 소방대원복을 입은 엑스트라들은 한줌 그늘을 찾아 다녔다. 지친 그들은 (미안한 비유지만) 마른 행주처럼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촬영 때문인지 아니면 더위를 쫓기 위해선지 누군가가 소방 호스로 뿌리는 물은 금방 사라졌다. 물이 사라지면 소방서 뒷마당 시멘트 바닥은 곧 지친 하얀 배를 드러냈다.

황색 진압복 차림의 신현준은 웅얼웅얼 인사를 하더니 어어 하는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매니저는 죄송합니다,어제 새벽 4시까지 촬영이 있었거든요,잠깐 눈 좀 붙이러…,라며 안절부절 못한다.

촬영 3개월째.삼복 더위 속에 불난리(火災)영화 촬영이라니 지칠만도 하다. 40분쯤 지나고 신현준이 다시 나타났다. 죄송합니다,너무 졸려서….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그의 첫인상은 놀랍게도 유약하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장군의 아들〉의 하야시,〈은행나무 침대〉의 황장군, 〈비천무〉의 진하가 부드럽고 약해 보이다니.

〈비천무〉이야기부터 시작했다.40억원을 들인 올 여름 한국 영화 최대작. 관객 동원에는 어쨌든 성공했다. 그러나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기대 이하다. 신현준도 잘 알고 있었다.

출연작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가 뭐냐고 물었다. 당연히 지금 상영중인〈비천무〉라고 답하겠지. 그러나 그는 “작품마다 최선을 다한다” 는,다소 정치적인 답변으로 비켜갔다. 배우 경력 11년의 노련함, 아니면 〈비천무〉에 대한 실망의 표현일까.

〈비천무〉의 설리,김희선에 대해 그는 안스러워 했다. 설리 역에 희선이가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설리의 이미지와 그만큼 맞는 배우가 누가 있는가, 다만 희선이에게 좀 넘쳤던 역 같다, 무엇보다 TV드라마와 CF에서 익힌 연기의 잔 기술이 몸에 배어있었다, 영화에선 그런 잔기술이 안 통하는데…,라는 설명이었다.

심은하를 훌륭한 여배우로 꼽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 배우는 뭔가 신비로운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탁월하다는 것이다. (신현준은 심은하와 TV드라마 (MBC ‘1.5’)만 딱 한번 공연했을 뿐, 함께 영화를 찍은 적은 없다.)

전지현으로 대표되는 n세대 스타들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었다. 배우로서 너무 일찍, 너무 과도하게 대중에게 노출됐다는 것이다.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임권택 감독의 이야기를 인용해 배우는 일단 서른이 넘어야 한다고, 또 결혼해서 아이를 나아봐야 진짜 연기라고,그런 점에서 자신도 아직 멀었다고 했다.결혼해 아이를 낳고 싶지만 개인적으로 여자를 만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런가.

황장군·진하의 거친 이미지와 달리 부드럽고 약한 것이 진짜 모습인가. 또다른 이미지 조작은 아닌가. 신현준은 사실 영화에서 보여준 캐릭터는 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하, 아들을 안아보고 싶지만 뒤돌아서서 눈물 흘리는 검객은 얼마나 유약한 것이냐고 했다. 현실의 나와 비슷한 그런 캐릭터는 내가 추구하는 것이다,관객들은 그런 영화에 눈물을 흘릴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동시대의 명배우라고 할만한 한석규에 비교해 출연한 영화의 폭이 좁은 것은 그 때문이냐는 공격적인 물음에 그는 순순히 동의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연기만을 한다,그러나 〈은행나무 침대〉〈퇴마록〉〈비천무〉로 이어지듯 매번 새로운 쟝르의 영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신현준은 눈을 부릅뜨고 칼을 들지 않고서는 성공한 영화가 없다. 골수 팬이 아니라면〈채널 69〉〈남자이야기〉〈지상만가〉에서 그의 모습을 누가 얼마나 기억할 것인가.그 런 영화가 있긴 있었던가. 아픈 사랑에 절규하는 무사의 이미지를 깰 수 있느냐에 배우로서 신현준의 장수(長壽)여부가 달려있다. 삼복 더위에 찍고있는 〈싸이렌〉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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