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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염치와 자부심은 형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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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예영준
중앙SUNDAY 차장

햇볕 다사롭던 봄날의 서울 도심이 아수라장으로 변한 건 2008년 4월 27일의 일이다. 일요일 오후의 평화를 불청객들이 몰려와 망쳐버린 것이다. 그날은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단이 서울 도심을 통과하던 날이었다. 수도권에 살고 있는 중국 유학생들이 사발통문이라도 돌린 듯 수천 명이 성화 봉송 코스를 따라 집결했다. 한 켠에서 티베트 문제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리자 중국 청년들이 몰려가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쇠막대기와 돌이 하늘을 날았고 대로변 건물들의 유리창은 박살이 났다. 주변에 있던 시민은 물론 경찰, 취재 기자, 외국인 관광객에 이르기까지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외교통상부가 중국 대사관의 책임 있는 관계자를 불러 엄중 항의하는 건 누가 봐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튿날 닝푸쿠이(寧賦魁) 중국 대사가 외교부를 방문했다. 하지만 그가 외교부에 나타난 건 우리 정부가 불러서 온 게 아니라 체포된 중국 청년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 이후 한·중 당국 간의 협의가 몇 차례 이어졌으나 중국은 끝내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공개 석상에서 “이번 사건은 학생들의 선량하고 우호적인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고, 한국의 관련 부처가 공정하게 처리할 것으로 믿는다”는 발언까지 했다. 결국 청년들은 처벌을 면하고 석방됐다.

 그 무렵 한 외교관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기억난다. “학생들의 신병 처리는 한국 국내법에 따를 것”이라고 하자 중국 측은 “그럼 우리도 모든 사안을 중국 국내법에 따라 할 수밖에 없다”고 맞받아치더라는 것이다. 순간 외교관의 머릿속에는 탈북자 문제가 떠올랐다고 했다. 중국 국내법의 잣대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게 탈북자 문제다. 그 외교관은 이렇게 하소연했다. “국내 여론은 사과를 받아 내라고 들끓는데 솔직히 뾰족한 방법이 없다. 중국은 대외적으로 체면이 손상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탈북자 문제를 비롯해 우리가 중국의 협조를 받아내야 할 일이 수없이 많다. 언론도 그런 사정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로부터 4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엊그제 중국 어선 단속 과정에서 발생한 살해 사건도 돌아가는 모양새는 성화봉송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번에도 중국은 유감 표시로 그치고 사과 없이 넘어가려 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하늘을 찌르고 있는 중국의 자존심이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대국다운 태도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탈무드에서 이르기를 자부심과 몰염치는 형제간이라 했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염치를 잃게 되기 십상이란 얘기다. 한·중 외교 당국이 지혜를 발휘해 이번에는 체면도 살리고 염치도 살리고 실리도 챙기는 해결책을 찾았으면 한다. 내년이면 한·중 수교 20주년, 사람으로 치면 성인에 드는 나이가 됐으니 그런 해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예영준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