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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5) 김용환이 건넨 500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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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밤에 잠이 잘 안 온다.” 1997년 12월 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측근에게 털어놨다는 이 말은 언론에서 화제가 됐다. “경제 현안 보고를 받고 보니 위기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더라”는 고민에 전국이 불안에 떨었다. 그래서일까. 꼭두새벽에 외환일보가 도착하면 그의 침실엔 어김없이 불이 켜졌다고 했다. 왼쪽 작은 사진은 김용환 전 비대위원장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98년 2월 5일자 외환일보. 정식 제목은 ‘외환보유고, 금리 및 주가 동향 일일보고’다.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일단 급한 대로 이걸 쓰지.”

 1997년 12월 27일,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이 출범한 첫날. 김용환 비대위원장이 봉투를 건넸다. 5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당장 필요한 데 쓰라는 것이었다. 당시 비대위는 ‘무소불위’였다. 기획단은 그 비대위의 ‘초미니 정부’로 불렸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과 현실은 딴판이었다. 정식 기관도 아닌 비대위인지라 예산 한 푼 배정돼 있지 않았다. 그 비대위의 산하 조직 뻘인 기획단임에랴. 당장 ‘기획단장’인 나부터 월급 한 푼 없는 ‘무보수 명예직’ 이었다.

 김 위원장이 건넨 500만원으로는 사무용품 사기도 빠듯했다. 직원들은 자기 컴퓨터를 가져와 썼다. 사무용품은 대부분 한국투자신탁 창고에서 꺼내 썼다. 스테이플러·포스트잇도 없어 한투 직원들 눈치를 봤다.

 가장 애매한 게 점심 시간이었다. 비대위 사무실은 항상 손님들이 바글거렸다. 가는 정부와 오는 정부가 함께 만든 게 비대위다. 경제 정책의 큰 그림이 전부 여기에서 나왔다. 자연히 국회의원·관료·당직자들이 몰렸다. 바로 그때가 문제였다. 비대위원들이 국회의원 등과 점심을 먹으러 가면 남은 수행 비서나 보좌관들은 종종 기획단 직원들과 점심을 먹었던 모양이다. “국회의원 보좌관들은 당연히 우리가 점심을 산다고 알고 있는 눈치더라고요. 우리도 회식비나 판공비는 꿈도 못 꾸는 입장이니… 매번 ‘점심값은 누가 내나’ 하고 서로 쳐다봤지요.” 한국금융연구원에서 파견 나왔던 서근우가 나중에 들려준 얘기다. 이 얘기를 듣고선 봉투를 내줬다. “그걸로 짜장면이나 사먹으라” 했지만 그 돈도 오래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획단의 첫 임무는 외환일보 작성이었다. 한국의 외환 금고는 물이 들어찬 소금 창고 같았다. 외환 사라지는 것이 꼭 소금 녹아내리듯 했다. 두 달 사이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신용등급이 10단계 추락한 나라였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나라. 외국인들은 앞다퉈 돈을 빼갔다.

 오늘은 또 얼마나 녹아내렸나. 외환보유액을 확인하는 것은 응급조치의 시작이었다. “외환보유액 숫자는 비대위가 가장 먼저 확인한다.” 숫자를 확보해야 상황을 장악할 수 있다. 한국은행에서 파견 온 오진규가 그 일을 맡았다. 외환집중제. 우리나라를 드나드는 모든 외환은 한은 창구를 거친다. 오진규는 매일 자정 창구에서 따끈따끈한 숫자를 받아왔다. 런던 외환시장이 문을 닫는 시각이었다.

 자정에 숫자를 받으면 일보는 새벽 서너 시에야 완성됐다. 내용은 간단했다. 그날 들락거린 외환과 남은 외환보유액 정도였다. 보고서 양식은 김용환 위원장이 직접 손질했다. 보고서는 아주 간명해졌다. 나는 김 전 장관의 솜씨에 항상 감탄했다.

 완성된 보고서는 김용환 위원장을 거쳐 대통령 당선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외환일보가 당선자의 경기도 일산 집에 팩스로 들어가는 시각이 보통 새벽 4시30분쯤. 비서가 그 종이 한 장을 침실 문틈으로 밀어 넣으면 어김없이 침실에 불이 켜졌다고 했다. DJ가 새벽마다 일어나 숫자를 확인했다는 얘기다. 김용환 전 장관이 직접 전해준 일화다.

 종이 한 장 내려앉는 소리에 잠을 깨는 대통령 당선자. 얼마나 처연한 얘긴가. 누구나 들으면 혀를 찼다.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면….” 밤새 애를 태우며 외환일보를 기다리는 대통령 당선자, 그가 맡게 될 풍전등화의 나라. 이 처연한 이야기가 관가에 퍼지며 비대위의 위상이 굳건해졌다. ‘대통령 당선자는 비대위의 보고서로 새벽을 시작한다’가 정설이 됐으니. 재정경제원과 정보 공유를 둘러싸고 벌이던 실랑이도 이즈음 마무리됐다.

 지금은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3000억 달러를 오간다. 덕분에 최근 지구촌 재정위기 속에서도 한국 경제는 덜 흔들렸다. ‘외환 방패’라는 칭찬을 받을 만하다. 한때 “외환보유액이 지나치게 많다.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지적이 나온 적이 있다. 헛웃음이 나왔다. 말이 안 되는 얘기라서가 아니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구나 싶어서였다. 외환이 바닥나 속이 타들어 가던 것이 불과 14년 전이다.

 적정한 외환보유액 수준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고 중간 사이즈인 나라는 항상 외환을 챙겨야 한다. 한때 완전히 구멍이 났던 외환 금고를 다시 쌓느라 얼마나 국민이 고생했던가. 그 고생을 잊지 않는 것, 외환위기가 남긴 교훈이다.

만난 사람=이정재 경제부장
정리=임미진 기자

등장인물

▶ 서근우(52)

- 서울대 경제학과 박사 출신. 내가 한국신용평가사 사장을 지내던 88년 정운찬 교수의 추천으로 한신평에 입사하며 인연을 맺는다. 비대위 기획단과 금융감독위원회 구조개혁기획단에서 기업 구조조정을 이끌었다.
 
▶ 고(故) 오진규

- 한국은행에서 파견된 기획단 직원이었다. 한은 창구에서 직접 외환 통계를 챙겨 매일 새벽 DJ에게 보고되는 외환일보를 만들었다. 이후 한은 시장운영팀장을 맡고 있던 2007년 자택 화재로 안타깝게 사망했다. 4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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