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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눈의 혁명’… 제 발등 찍은 푸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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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0일 발간된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표지. 부정 선거 의혹에 분개한 러시아 국민의 대규모 시위 등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통치 체제에 금이 가고 있는 현실을 표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딜레마에 빠졌다. 총선 직후 전례 없는 대규모 항의시위 때문이다. 12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하며 과격한 ‘마초맨’으로 불렸던 푸틴 총리이지만 이번에는 3개월 앞으로 다가온 차기 대선에 성난 민심이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신중하게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미국 주간지 타임은 11일(현지시간) “집권 여당도 시위의 주축이 일반 시민이라는 점을 의식해 이들의 요구에 답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푸틴 총리의 자문그룹과 통합러시아당 간부들이 시위가 시작된 직후부터 여러 차례 만났지만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익명의 통합러시아당 관계자는 “당 고위층 다수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시위를 당장 진압하자는 쪽이고, 소수는 대중에게 이렇게 감정을 분출할 기회를 주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시위가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며 “현재까지는 합리적인 소수파 의견이 더 존중받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이날 선거 부정 의혹을 조사하겠다고 밝힌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에 동의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제기된 모든 선거법 위반 의혹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불과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글에는 수천 건의 비난 댓글이 달렸다. 타임 역시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시위대의 최우선 요구인 총선 결과 무효화와 재선거 실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라며 “최대한 양보할 수 있는 수준은 자유민주주의 성향을 띤 ‘꼭두각시 야당’을 만드는 정도인데, 이런 미봉책은 유권자의 화만 돋울 뿐”이라고 지적했다.

 뉴욕 타임스(NYT)는 “푸틴 총리가 난감해하는 이유는 시위를 벌이는 이들이 바로 자신이 통치하는 동안 석유 수출과 부동산시장 활성화 등으로 부를 누리게 된 중산층이라는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또 “경제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치적 권리에 민감해져 부패 등에 분노하기 쉽다”며 “이에 푸틴 총리의 지지층이어야 할 이들이 그의 대권 재도전과 선거 부정에 모욕감을 느끼고 거리로 나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BBC방송은 “시위대가 옷가지와 가방 등에 묶은 하얀 리본은 ‘부정에 대한 항거’를 뜻한다”며 “이번 시위의 상징이 된 하얀 리본은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그루지야의 장미혁명, 키르기스스탄의 튤립혁명 등 옛 소련연방국의 혁명을 본떠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 하얀 리본 때문에 시위대와 외신들은 이번 시위를 ‘눈의 혁명(Snowy Revolution)’이라 부르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 역시 “푸틴 총리는 보리스 옐친 통치기에 떨어진 생활수준을 원자재 수출 등을 통해 높이면서 인기를 얻었지만 이번 선거와 시위의 교훈은 이런 ‘포스트 옐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라며 “이제 정부가 경제적 성장뿐 아니라 법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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