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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뜬소문의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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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순조 26년(1826) 청주성 북문에 괘서가 걸렸다. 조정의 무능, 관리부패, 왕실비리를 고발하고, 홍경래가 살아서 한양을 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과감하게 이름을 밝혔던 괘서 작성자는 관헌에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조선은 유언비어 유포자를 사형으로 다스렸다. ‘글을 지으면 허(虛)가 실(實)이 되어’ 민심의 동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지난 7일, 어떤 판사가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오늘부터 SNS 검열 시작이라죠? 방통위는 나의 트윗을 심의하라…앞으로 쫄면 메뉴도 점차 사라질 듯. 쫄면 시켰다가 가카의 빅엿까지 먹게 되니. 푸하하.” 조선으로 치면, 사헌부 지평(정5품)이 쌍말로 쓴 상소문을 임금에게 날린 격이다. 요즘 인기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이 흔들린 대목이 이것이다. 글을 깨우친 백성이 권력을 능멸하고 넘보는 것을 원하시는가? 사대부들의 이런 반격에 세종은 답이 궁색했다. 상상치 않았던 그런 사태에 비답은 없었다.

 한국인들의 이야기 사랑은 유별나다. 18세기 서울 종로거리에 전문 이야기꾼이 등장해 잔돈푼을 벌어 썼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소설을 읽어주는 강독사, 판소리가락을 읊는 강창사가 인기를 끌었다. 개화기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뜬소문의 나라’였다.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얘기를 외쳐대는데, 자신이 거짓과 과장으로 윤색한 소문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1880년대 조선에 온 러시아 외교관 미하일 포지오는 대화를 향한 한국인의 열정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한국인이 수다쟁이이며 매우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썼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이야기를 엄청나게 부풀려서 치장하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고,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향한 유별난 열정이 IT기술과 결합해 한국을 최고의 SNS 국가로 만들었다. 그 덕에 사회지도자급에 속하는 판사가 ‘내 트윗을 검열하라, 푸하하’라고 비웃고, ‘가카헌정방송’에 이천만 애청자가 몰렸다. 사이버 이야기판이 새로운 차원의 공공성을 획득하자 급기야는 국가권력을 허위의 구덩이 속에 처박아버렸다. 그러니, 왜 ‘규제’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겠는가. SNS 공세에 돛대가 부러지고 고물이 깨진 집권세력은 참수까지는 아니라도 검열권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저 광화문 한복판에서 천지개벽한 한국사회를 굽어보는 세종이 환생한다면, 이 규제조치들에 대해 뭐라 하교하실까.

 국가권력이 사사로움을 벗고 시민 곁으로 다가선다면 거짓과 과장으로 포장된 괴담, 비속어와 은어로 가득 찬 원색적 담론들은 스스로 설득력을 잃는다. 과장된 얘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기질 탓도 있겠지만, 괴담과 괘서가 대중심리를 파고드는 것은 지배권력이 사회적 교감에 무지하고, 제도권 언론과 방송이 정보를 특정 논리로 가공한 책임이 더 크다. 그럴 때 대중이 대체적 수단으로 몰려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한국엔 그런 대체 미디어가 무궁무진하다. 규제권력은 ‘대중이 무지하다’는 계몽주의적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대중은 결코 무지하지 않다. 생활현장에서 습득한 생생한 감각으로 교감 가능한 자를 본능적으로 가려낸다.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는 간파능력은 정치인을 뛰어넘는다.

 대중들은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가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배후의 역습’임을 이미 간파했다. 그래서 그 난무하는 욕설 속에 간간이 비치는 이면 정보를 퍼담아 진정성에의 갈망을 채운다. 자신들을 옭아맸던 거대한 공적 정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이 역습담론에 독자와 청자들이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제도권 매체와 정치권력은 민심독해에 처참하게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지금이 딱 그런 때다.

 경직된 권력일수록 역습담론에 공포를 느끼고 억압적 방식을 동원한다. 국가기강을 강조한 조선 사대부들은 향촌 질서를 어지럽히는 패관잡서를 불태우고 잡류를 엄금할 것을 명했다. 잡류란 사당, 창기, 광대 등 서민예술단이자 백성이 속 시원해 하는 정보의 전파자였다. 이 논리대로라면, 불온한 말을 마구 질러대는 나꼼수 4인방은 명랑한 잡류에 속한다. 나를 검열하라고 푸하하 웃는 그 부장판사도 겁 없는 잡류다. 그 발칙한 4인방이 미국의 초청을 받아 오늘 스탠퍼드대학에서 불온한 괴력을 시연할 예정이다. 한국의 국가가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지, 지배권력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세종이라면 반란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백성들에게 국가전횡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앎의 힘을 주고 싶을 것이다. 이를 요즘 용어로 표현하면 이렇다. ‘시민에게 책임을 나눠주면 스스로 자기 검열 기제를 작동할 것이다.’ ‘잡류담론’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분명 억압사회이고, 시민들이 등을 돌린 불통사회다. 디지털 시대에 SNS 규제는 어리석은 자들의 자충수에 지나지 않는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