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서 코피 흘린 이상득, 와인 엎질렀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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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형통(萬事兄通)’ ‘영일(지금의 포항)대군’….

 이명박 정부에서 이상득(76) 의원을 따라다녔던 꼬리표들이다. ‘대통령의 형’이라는 신분은 집권 여당의 최다선(6선) 의원이면서도 국회의장이 되지 못하게 한 장애이자 그에게 더 큰 권력과 책임을 안겨준 원천이었다.

 이 의원은 코오롱 사장 출신으로 1988년 13대 총선에서 경북 영일-울릉에서 민정당 후보로 당선된 이래 23년간 정치권을 떠나지 않았다.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사무총장·최고위원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엔 이명박 후보를 포함해 이재오 최고위원, 박희태·최시중·김덕룡 선대위 고문이 참석하는 ‘6인 원로회의’를 주도하며 동생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거쳐 또 다른 대선 유공자인 정두언 의원이 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면서 그에겐 힘이 더 쏠렸다. ‘만사형통(모든 일은 형님을 통하면 된다)’이란 말도 이때부터 나왔다.

 그러나 당내 소장파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정두언·남경필 의원 등 당 지역구 후보 55명이 이 의원의 불출마를 요구했고, 소장파가 권력 사유화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2009년 6월 “정치에서 물러나 자원외교에 전력을 다하겠다”며 2선 후퇴 선언을 했다. 이후 최근까지 남미·아프리카·중앙아시아 12개국을 방문해 각국 정상들과 면담만 23차례 소화했다. 비행거리가 29만4883㎞에 달하는 강행군이었다. 자원외교 길에 동행했던 의원들은 “비행기 안에서 코피를 흘렸으면서도 ‘옷에 와인을 엎질렀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민주당도 그를 ‘권력의 숨은 핵심’으로 지목하며 흔들었다. 지역구(포항)에 배정되는 예산은 ‘형님예산’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민간인 사찰 문제와 ‘영포회’(영일·포항 출신 공무원 사조직) 논란이 불거질 때는 이 의원을 ‘몸통’으로 지목했다.

이 의원은 11일 “대통령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온갖 억측과 비난을 받을 때는 가슴이 아팠지만 묵묵히 소임을 다하며 올바른 몸가짐에도 최선을 다해왔다”며 “평생을 바쳐온 한나라당이 새롭게 태어나는 데 하나의 밀알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하고 당사를 떠났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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