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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47) 예첸위·왕런메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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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봄, 50년 친구인 딩충(오른쪽), 황먀오즈(왼쪽)와 함께 고향인 저장(浙江)성 퉁루(桐廬)를 찾은 예첸위(가운데). [김명호 제공]

1950년 가을부터 6개월간 예첸위(葉淺予·엽천여)가 티베트에 가있는 사이 다이아이롄(戴愛蓮·대애련)은 신중국 최초의 무용극을 연출하며 주인공으로 발탁한 청년 무용가에게 넋이 빠졌다. 10여 년 후 다이의 패물과 돈을 들고 홍콩으로 도망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춤꾼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예첸위는 6년이 지나서야 다이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명예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왕년의 대스타 왕런메이(王人美·왕인미)와 살림을 차렸다. 왕런메이는 영화 황제 김염(金焰)과 이혼한 후 10년간 혼자 살고 있었다. 예첸위 48세, 왕런메이 41세 때였다.

왕런메이의 부친은 제자였던 마오쩌둥이 “내가 본 최고의 수학선생 이었다”고 했을 정도로 유명한 수학교수였다.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겠다며 여자사범학교에 합격한 왕런메이는 부친이 벌에 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인생이 바뀌었다.

왕런메이는 오빠들이 있는 상하이에 나왔다가 중화가무단(中華歌舞團)에 가입해 싱가포르·방콕·자카르타 등지로 공연을 다니며 안목을 넓혔다. 1949년 10월, 신중국 수립과 동시에 국가로 제정된 ‘의용군 행진곡’을 작곡한 니에얼(<8076>耳·섭이)과는 친남매나 다름없이 지냈고 의용군 행진곡을 제일 처음 부른 사람도 왕런메이였다.

왕런메이와 예첸위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가무단 시절 황먀오즈(黃苗子·황묘자)를 따라 딩충(丁聰·정총)의 집에 놀러 갔다가 처음 알았지만 남들 몰래 따로 만난 적이 없다 보니 서로의 성격을 살필 기회가 없었다.

30여 년에 걸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조용한 날이 거의 없었다. 예첸위의 딸에 의하면 “왕런메이는 애정은 한순간이지만 우정은 영원하다며 김염을 잊지 못했고,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시도 때도 없이 다이아이롄의 모습이 오락가락했다”고 하지만 예첸위의 경제적 무관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예첸위와 왕런메이의 결혼소식이 알려지자 궈뭐뤄(郭沫若·곽말약)·치바이스(齊白石·제백석)·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등 당대의 명인들이 선물을 보내왔다.
예첸위도 친구 10여 명을 당시 최고의 요릿집 ‘사천반점(四川飯店)’으로 초대했다. 왕런메이는 이날의 일을 구술로 남겼다. “예첸위는 밥값으로 200원 가까이를 지불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오늘 날짜로 파산이라고 했다. 200원이 이 사람의 전 재산이었다. 그간 그림을 판 돈이 한 푼도 없느냐고 물었더니 남들을 주기는 했어도 판 적은 없다고 했다. 이날부터 내 돈으로 살림을 꾸려 나갔다. 집 안은 어찌나 더러운지 3일에 한 번씩은 이혼 얘기가 나왔다.”

문혁시절 예첸위는 10년간 감옥과 수용소를 오갔다. 사인방(四人幇)이 몰락한 후 그간 받지 못했던 봉급 3만원이 한꺼번에 나오자 중앙미술학원에 학생들 실습비로 기증해 버렸다. 집 수리로 돈이 필요할 때였다. 왕런메이는 친지에게 1000원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1986년 가을, 왕런메이가 “훌륭한 화가지만 형편없는 남편이다. 공원에 가서도 몇 시간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 스케치만 하며 내게는 말 한마디 거는 법이 없었다. 6시간 동안 그런 적도 있었다. 30년 동안 그랬다”며 따로 살 것을 요구했다.

그래도 예첸위는 매주 한 번씩 베이징영화(北影)초대소로 왕런메이를 찾아갔고 왕런메이도 가끔은 예첸위가 있는 중국예술연구원을 찾아왔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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